[논설위원의 시선] 미·중 패권경쟁의 서막 ‘반도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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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에 선 K반도체, 압도적 기술만이 살길이다

전쟁의 서막

“F-35B 스텔스 전투기의 고도를 높이려 조종대를 잡아당기자 기체가 항의하는 것처럼 신음했다. 찰스는 미사일을 꽁무니에 단 채로 기지 끝에 있는 하와이 울루파우 분화구를 향해 전속력으로 날았다. 하지만 중국의 미사일 레이더가 F-35B를 훑는 순간, 헬멧 디스플레이 시스템을 비행 조종 시스템과 연결하는 12개의 마이크로칩 중에서 아홉 번째 블록에 숨겨져 있던 작은 안테나가 활성화되었다. 순간 미사일이 그 신호를 포착하고 뒤를…. 파일럿 찰스의 운명은 서너 달 전에 이미 결정되었다. 수천 개의 전투기 칩 중 일부를 교체하는 과정에서 조작된 중국산 반도체 칩이 사용됐기 때문이었다.” (<유령함대-미·중 전쟁 가상 시나리오>에서 발췌)

미국 백악관을 비롯, 미군 4성 장군부터 정보·안보 관련자 사이에서 필독서처럼 읽히는 이 소설에서 중국에 연전연패한 미군은 중국산 칩과 사이버 공격에 자유로운, 폐기된 ‘유령함대’ 전함과 골동품 전투기 ‘본야드 편대’를 재정비해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하이테크전쟁> 등을 펴낸 미래학자 피터 싱어와 월스트리트 저널(WSJ) 국가 안보 및 방위산업 전문기자 출신 어거스트 콜이 함께 쓴 <유령함대>는 중국산 반도체와 AI(인공지능) 등 첨단 기술에 의한 미래 전쟁을 경고했다.


반도체가 국가미래 좌우
세계 1위 꿈꾸는 중국
공급망 차단 나선 미국
바이든, 中 포위작전 추진
동맹국과 진영 스크럼 짜
화웨이 부회장 억류도
시진핑은 ‘제조 2025’ 발표
첨단기술 자립화에 올인
패권다툼 새우등 터진 韓
미·중 양자택일 강요받아
유일한 생존법은 기술 우위
양국 네트워크 동시 가입 등
국익 맞춤 전략도 필요



미·중 반도체 공방은 ‘기술패권’ 전쟁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소설 <유령함대> 현실성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듯하다. 바이든 대통령은 2021년 2월 10일 취임 이후 국방부를 방문해 국방부 산하 ‘차이나 TF’를 신설하고, 대중국 안보정책 전략보고서를 발표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군사·안보적 차원에서 중국을 경쟁국 혹은 위협국으로 여기고 있음을 뜻한다. 바이든은 “반도체를 21세기 편자의 못”이라 강조하면서 중국 수출 제재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못(반도체)이 없으면 국가가 망할 수 있고, 반도체는 미래의 무기, 국가 안보의 핵심이라는 미국의 인식을 보여 주고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미·중 기술패권 경쟁과 시사점’ 보고서에서 “거의 모든 분야의 첨단기술이 국가안보 문제와 직결된 상황에서 미·중 무역 분쟁의 본질이 기술패권전쟁”이라고 요약했다.

<유령함대>에서 예언했듯 반도체와 AI, 5G 등 중국의 첨단기술 패권 추구를 안보 위협이라고 판단한 미국의 공격은 예사롭지 않다. 미국이 중국 AI 및 통신 1위 기업 화웨이를 정조준한 가장 큰 이유도 ‘기술 패권’이다. 미국은 중국 감시카메라 제조업체인 하이크비전과 다화테크놀러지, 음성인식 AI 기업 아이플라이텍, 중국의 안면인식 기술업체인 매그비테크놀러지 등도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중국 고립 방안은 반도체 공급 차단

바이든은 지난 12일 세계 1·2위 파운드리(반도체 생산 전문 기업)인 대만 TSMC와 삼성전자 등이 참석한 백악관 화상회의에서 반도체 웨이퍼를 들고 “반도체는 인프라”라면서 ‘중국을 고립시킬 방안으로 반도체 동맹’을 제시했다. 화웨이 등 중국의 5G와 AI, 반도체 기업들이 미국과 기술 격차를 좁히기 전에 반도체 공급망을 차단해 싹을 자르겠다는 패권 전쟁의 서막이었다.

바이든은 동맹국들에는 가치 공유를 통해 중국을 포위하는 ‘진영 스크럼’ 전략을 독촉하고 있다. 반중국 안보 네트워크인 ‘쿼드 플러스’와 반중 경제블록인 ‘경제 번영 네트워크(EPN)’에 한국의 참여를 요청하고 있다. 미·중경제 탈동조화(디커플링: Decoupling) 추진에도 국가의 명운이 걸려 있다. 미국이 중국을 배제한 새로운 글로벌 공급망 구축을 추진할 경우 중국 시장 의존도가 큰 한국으로서는 사면초가에 빠지게 된다. 물론 중국은 한국이 미국 편에 서면 큰 대가를 치를 것이라며 위협하고 있다.

화웨이의 선택지도 넓지 않다. 화웨이 런정페이 CEO의 딸인 멍완저우 화웨이 부회장 겸 최고재무책임자(CFO)가 미국의 대이란제제 위반 혐의로 2018년 캐나다에서 체포돼 2년 넘게 재판을 받고 있다. 멍 CFO가 미국으로 인도되는 순간, 미국 교도소에 수감된다. 이미 중국 제2위의 통신장비회사인 ZTE도 ‘이란과 북한에 미국 부품이 들어간 첨단 제품을 팔았다’는 혐의로 거액의 벌금을 내고, 임원을 해고하는 등 무릎을 꿇었다. 프랑스 대표기업 알스톰 자회사의 프레데릭 피에루치 CEO는 자신의 실제 경험을 담은 <미국함정-미국의 무자비한 글로벌 약탈>을 통해서 2013년 뉴욕 공항에서 미국 해외부패방지법(FCPA) 위반 혐의로 FBI에 체포된 뒤, 중범죄자 교도소에 2년간 수감되고, 3년의 보석 등 5년간 자유를 박탈당한 수난을 폭로했다. 미국은 피에루치 CEO를 지렛대로 삼아, 알스톰에 벌금 7억 7200만 달러를 내게 하고, 에너지 사업 분야를 경쟁사인 미국 GE에 매각하게 만든다.



중국의 꿈과 강한 군대의 꿈, 그 결과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중국몽(중국의 꿈)’이 패권국가 미국을 자극한 요소다. 시진핑 주석은 미국에 ‘태평양 공동 관리권’을 요구하고, 건국 100주년인 2049년 중화 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몽’과 ‘강군몽(강한 군대의 꿈)’을 제창했다. 시진핑은 5G 및 산업용 로봇, AI, 신에너지 자동차 등 차세대 첨단산업 육성 등 2045년까지 첨단제조업 세계 최고를 목표로 하는 ‘중국제조 2025’ 산업전략을 발표했다. ‘중국제조 2025’에서 미국이 긴장하는 핵심 단어는 ‘군민융합’이다. 반도체와 신소재, AI 등 첨단기술을 국가 예산으로 개발한 뒤 민간 산업계와 공유하는 산업발전 전략이다. WTO 제재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는 '지각AI+자율AI+5G'를 결합한 통합 군용 무기체계 구축으로 이어진다는 게 백악관의 판단이다.

세종연구소는 ‘바이든 행정부의 대중 군사-안보 정책: 지속과 변화’ 최신 보고서에서 “현재 중국군은 AI, 양자정보, 빅데이터, 클라우드 컴퓨팅, 사물인터넷 등 첨단과학기술이 빠르게 군사 분야에 적용되고 있으며, 새로운 과학기술 혁신과 4차 산업혁명 도래에 따른 지능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만큼 미국도 물러서기 어려운 상황이다.

미국 제재로 중국 화웨이 등 첨단 기술 업체들은 신규 반도체 공급처가 없어지면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됐다. 중국은 4~5년 개발이 늦어지겠지만, 산업계에 대대적인 국가 보조금 확대와 군민융합을 통해 첨단 기술 국산화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시진핑은 2013년 공산당중앙위원회에서 루쉰의 소설을 인용, “어렵더라도 중국은 중국의 길을 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 이후 2019년 “새로운 대장정” 발언 등 기술패권 경쟁에 장기적으로 갈 길을 가겠다는 속내다. 내부적으로도 미국의 압박에 당장 굴복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역사적으로 강대국 패권 전쟁은 어떤 형태로든 한쪽이 굴복할 때까지 지속되는 특성을 갖고 있다. 한두 번의 우호 제스처로 끝날 ‘전쟁’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강대국 파워게임, 한국의 선택

유일한 생존법은 상대방으로부터 존중받을 수 있는 수단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KIEP는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것은 반도체 관련 압도적인 기술력”이라면서 “반도체 1위 국가인 한국으로서는 높은 혁신 생산성으로 중국과의 기술과 투자 격차 유지가 더욱 중요해졌다”고 강조한다. 만약, 혁신 생산성과 기술 우위마저 추월당하면, 미·중 패권 전쟁 속에서 강요에 의해 누군가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을 맞을 수도 있다는 우려다.

중국도 이에 질세라 상하이협력기구(SCO) 등 역내 다자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미·중 간 헤게모니 싸움 한복판에 낀 한국으로서는 트럼프 행정부 때보다 양자택일의 압력이 오히려 높아지고 있다.

KIEP 베이징사무소 대표를 역임했던 부경대학교 국제지역학부 서창배 교수는 “눈에 보이는 중국의 보복을 앞에 두고 반중국 경제 정책을 펴는 것은 위험하다”면서 “한국은 중립적 자세를 유지하면서 중국 측의 상하이협력기구, 미국 측의 쿼드 플러스 등에 동시 가입을 검토하는 등 다양한 가능성에 맞춰 국익에 따라 대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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