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삼의 타초경사(打草驚蛇)] 우리 미나리는 안녕하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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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대 자유전공학부 특임교수

‘미나리’는 미국 할리우드에 성공적으로 이식된 듯하다. 한국식 가족주의가 보편성을 획득한 셈이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서 스치는 의문 하나. 한국의 미나리들은 안녕하신가? ‘노인과 바다’의 고장 부산의 대로변에는 유독 요양병원들만 늘어나는데, 우리 미나리들은 그 속에서 말라 죽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왕조가 망한 뒤 식민지 조선은 가족주의에 치를 떨었다. 춘원 이광수가 “조선의 자녀는 오로지 부조(父祖)를 위하여서만 살고 또 일하다 죽는, 부조 중심의 삶을 강요받았다”라며 “개인의 행복의 전부인 교육과 혼인의 자유까지 부모에게 박탈당하였다”라고 내뱉은 말 속에 가족에 대한 증오감이 넘쳐난다. 해방 후 가족에 대한 증오는 더 컸다. 영문학자 김우창은 이렇게 비판했다. “한국 사회 부패의 한 이유는 가족 제도의 폐쇄성과 부패에서 온다. 가족 제도는 그 자체가 삶의 가능성을 억압하는 것이지만, 설사 그것 나름의 윤리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가족의 범위를 넘어서지 아니한다.”

폐쇄적 가족주의에 신음한 동양의 역사
서구, 개인주의 반성 인간의 관계성 성찰
참사랑은 복종 아닌 다름에 대한 인정
유교가 추구했던 가족 복원의 출발점

드디어 이 땅에는 홀로된 사람들로 넘실댄다. 젊은이들은 ‘혼술’ ‘혼밥’을 먹으며 고립된 삶을 살고 늙은이들은 아예 고독사로 내몰린다. 한 노인의 말이 뼈를 때린다. “돈 만 원은 쪼개 쓸 수 있으나 고독은 쪼개 쓰지 못한다.”(2019년 1월 ‘EBS 독거노인 특집’) 최소한의 생존 비용인 1만 원은 굶어서라도 아껴 쓸 수 있으나 고독한 인간의 처지는 메꿀 수 없다는 하소연이다.

도리어 서구에서는 개인주의의 반성으로 인간의 관계성에 대한 깊은 성찰이 이뤄졌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계약 관계로만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이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통해 드러났기 때문이다. ‘미나리’의 본고장은 극단의 개인주의로 치닫는 형편인데, 저쪽은 외려 관계론을 중시하는 추세라니 이것은 아이러니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그토록 증오한 유교의 가족주의가 본시 가족의 붕괴를 극복하려는 운동이었다는 사실이다.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는 처참한 전쟁의 세월이었다. 와중에 가족은 갈가리 찢겼다. 농사를 지어 가족을 부양해야 할 남편이자 아비이자 아들인 남성이 전쟁터로 끌려갔기 때문이다. 도처에 가족이 붕괴했다. 맹자는 해체된 가족의 실태를 환과고독(鰥寡孤獨), 곧 ‘홀아비, 홀어미, 고아와 독거노인’만 남은 시대라고 고발한 터다(오늘날의 혼술·혼밥·고독사와 무엇이 다른가).

놀랍게도 공자는 살육을 자행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부모 자식 간에 흐르는 사랑의 지하수를 발견한다. 아, 부모의 내리사랑은 인간만 아니라 모든 동물이 다 그러하다. 다만 입은 은혜를 되갚겠다는 자식은 인간이라는 동물밖에 없다. 되갚으려는 이 마음을 ‘효(孝)’라 하고 우리말로는 ‘치사랑’이라 이른다. 유교란 무엇인가. 내리사랑과 치사랑의 순환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확산하여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겠다는 기획이다. 따라서 가족의 복원이야말로 사활이 걸린 주제였다. 이것이 유교의 가족주의다.

사랑의 순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따뜻한 기운을 ‘화목’이라 이른다. 그 운영 원리는 화이부동(和而不同) 네 글자 속에 들어 있다. ‘부동’은 다르다는 뜻이다. 곧 화목은 아비의 뜻에 처자식이 복종하는 게 아니라 서로가 다르다는 인식 위에서 추구하는 평화이다. 즉 구성원의 동질성과 이질성 사이에 빚어지는 갈등과 화해가 가족이다. 작가 공지영의 말을 빌리면 가족이란 ‘사랑하는-타인들의-만남’이다. ‘가족은 힘이자 짐이다’라는 속언도 가족의 양면성을 잘 표현한 것이다.

효도 역시 부모에 대한 자식의 묵종이 아니라 오히려 부모를 올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다. 하버드대학의 뚜웨이밍 교수가 “효는 전제적 권력 행사를 위한 기초가 아니다. 효자가 복종적인 아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라던 말이 그 뜻이다.

그러므로 화목한 가정은 그저 웃음으로 충만한 집안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라는 구속과, 서로 다르다는 개체성이 길항하면서 갈등을 대화로써 해소하는 과정의 공동체다. 서로 부대끼는 와중에 상처를 자주 입지만 그럼에도 가족에서만 빚어지는 참사랑을, 마을로 나라로, 온 세상까지 펼치자는 것이 공자의 가족주의였다. 이것을 수신-제가-치국-평천하로 프로그램화한 것이 유교다. 다만 사랑이 가정의 문턱을 넘지 못한 채 제 자식과 부모만 아끼는 ‘가족주의’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경고도 이 속에 담겨 있다. 악을 쓰며 내다 버린 것이 혹 보물이었던 것은 아닐까? 영화 ‘미나리’의 성공을 기화로 돌이켜 보는 가족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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