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5월, 광주에 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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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석 문학평론가

부끄럽지만 나는 아직 ‘국립5·18민주묘지’에 가본 적이 없다. 학생 때는 그 길을 갈 인연에서 번번이 빗겨 서곤 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한동안 그곳을 잊고 살았다. 교수가 되고 연구자가 되어 세미나와 심사와 회의로 광주를 들락거려도, 이상하게도 그곳으로 가는 동행을 만나거나 일정을 확보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제법 시간이 흘러, 무려 41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1980년 나는 ‘국민학교’ 입학생이었다. 이제는 공식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어 써야 한다지만, 그 시절 ‘국민학교’가 지닌 상징성을 쉽게 버릴 수는 없다. ‘국민학교’는 우리가 지녔던 낡은 의식의 잔재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단어이기 때문이다. 이 단어에 담긴 잘못된 인식이 5·16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12·12 역시 저질렀다.

1980년 이후 41년 흘렀지만
‘5·18민주묘지’에 가본 적 없어

5월 광주·참혹한 미얀마 사태 등
이 묘역을 찾아야 할 시간 도래

정부군에 의해 무참히 희생된
죽은 자들의 의미 되새겨야


1980년 5·18도 마찬가지였다. 일제가 만든 ‘국민학교’라는 명칭이 옳다고 믿었던 한 독재자가 죽고 그 독재자의 뜻을 계승하겠다는 또 다른 독재자가 나타나던 시기에 그들이 그토록 충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대상을 그 어떤 표현보다 잘 표현하는 단어가 ‘국민학교’이기 때문이다. 자신 치하의 백성은 모두 ‘자랑스러운 국민’이 되어야 한다고 그들은 강조했고,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그렇게 강요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시절, 많은 이들은 그 독재자들의 국민이 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들’의 국민이 되기보다는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시민으로 죽기로 결심했기에, 그들과의 살벌한 전쟁에 무거운 마음으로 임해야 했다. 총칼의 승리는 그들의 것이었다. 하지만 시민들은 끝내 이겼고, 그 시민들은 ‘1980년 5월 광주’의 역사 옆에 아담한 ‘5·18묘역’을 세웠다.

요새 이 묘원에 다니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그런데 개중에는 그곳에 아직 갈 수 없는 이들도 포함된 것 같다. 화합과 평등의 시대에, 갈 수 있는 사람과 갈 수 없는 사람을 따로 분류하는 일이 시대의 정신에 맞지 않는다고 공박하는 이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5·18묘역에 갈 수 없는 이들이 아직 이 시대에 많이 남아 있다.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고 억지로 사과하는 사람, 정치적 이득을 위해 추도하는 척하는 사람, 자신과 남을 구별하기 위하여 과장된 묵념을 올리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이 사람들은 아직, 그 묘역에 가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이라면 이 묘역을 찾아야 할 시간이 도래했다. 세상은 다시 1980년 5월의 광주를 만들어내고 있고, 죽은 자들의 의미를 되새겨야 하는 시간을 불러내고 있다. 참혹한 미얀마가 그러하고, 슬쩍 무마된 것처럼 보인 타이가 그러하고, 홍콩이 그러하다. 그들에게는 아직은 세워지지 않았지만 조만간 세워야 할 제2, 제3의 망월동 묘역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정부군에 의해 아무렇지도 않게 살해되거나 고문받고 매장된 이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은 망월동 묘역과 다르지 않을 테니 말이다.

한때 4·18(4·19의 전초가 된 학생 시위)이 되면 북한산 기슭의 한 묘지로 달려가곤 했다. 그때만 해도 그곳을 향해 달려가는 이들은 많았고, 한때는 많은 시민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응원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교통이 막힌다고, 시끄럽다고, 때로는 이제는 다 끝났는데 왜 유난을 떠느냐고 말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자연스럽게 달려갈 이유가 줄어든 것 같았고, 참배는 어느새 흐지부지되기도 했다.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참배의 시간이 끝난 것이 아니었으며, 시끄럽다고 나무라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내일은 5·18묘지에 가보려고 한다. 아직 자격은 턱없이 부족하겠지만 자격이 안 되면 마음의 자격을 얻어서라도 말이다. 그곳에서 생각해 볼 일이 있기 때문이다. 세 손가락을 다급하게 들어 하늘 향해 뻗어야 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리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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