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참전용사 기쁨과 슬픔, 사진으로 재조명
69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습니다/라미 현
한국전쟁 참전용사 윌리엄 빌 베버. 그는 한국전쟁 중 전투하다 오른팔을 잃었고, 후송 중 다시 포탄을 맞아 같은 날 오른쪽 다리마저 잃었다. 그의 곁에는 늘 지팡이가 있다. 카메라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형형하다. 그는 미국 워싱턴의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에 설치된 동상의 모델 중 한 명이다. 마음의숲 제공
사진작가 라미 현(왼쪽)이 ‘한국전쟁 마지막 미군포로’ 윌리엄 빌 펀체스 씨를 켜앉고 있다. 마음의숲 제공
22개국 1500여 명 모습 카메라에 담아
전쟁에 관한 생생한 기억·경험 전해
참전용사들 삶 이야기 ‘한 편의 드라마’
인터뷰 과정서 경험했던 느낌도 서술
사진작가 라미 현. 그는 2016년 경기도 고양시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대한민국 육군 군복 사진전’에서 만난 한국전쟁 참전용사 살바토레 스칼라토 씨로부터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명을 받고 참전용사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긴 여정을 시작한다. 이후 그는 22개국 1500여 명의 참전용사를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69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습니다>는 한국전쟁 참전용사의 기쁨과 슬픔을 재조명한 사진작가 라미 현의 첫 사진 에세이집이다. 저자는 세계 각국에서 만난 참전용사들이 들려준 전쟁에 관한 생생한 기억과 경험을 켜켜이 전한다. 책엔 전장에서 겪은 공포와 슬픔, 한 편의 영화 같은 이야기, 그리고 사진이 담겨 있다.
69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습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가면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이 있다. 이곳에는 19개의 동상 중 판초 우의를 입고 소총을 든 동상이 있다. 이 동상은 ‘윌리엄 빌 베버’를 본떠 만든 것이다. 그는 한국전쟁 중 전투하다 오른팔을 잃었고, 후송 중 다시 포탄을 맞아 같은 날 오른쪽 다리마저 잃었다. 하지만 이런 부상에도 그는 현역 복무 의지를 강하게 밝혀 미국 남북전쟁 이후 수족을 차고 현역으로 복무한 첫 군인이 됐다. 라미 현이 그를 찍어, 2019년 6월 사진 액자를 선물하자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내가 뭘 해주면 되느냐고 물었다. 라미 현은 “선생님께서는 69년 전에 이미 다 지불하셨습니다. 저는 다만 그 빚을 조금 갚을 뿐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런데 윌리엄은 이렇게 말했다.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당신들이 빚진 것은 하나도 없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자유를 가진 사람에게는 의무가 있어요. 바로 자유가 없거나, 자유를 잃게 생긴 사람에게 그 자유를 지켜주는 겁니다. 우리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도 이 의무를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다만 당신들도 자유를 얻었으니 의미가 생긴 겁니다. 북쪽에 있는 당신 동포들에게 자유를 전달하는 것. 그 의무를 다했으면 합니다.” 윌리엄의 말은 점점 잊어가는 한국전쟁을 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지 그 이유와 당위성을 말해주고 있다.
저자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카메라에 담으며 경험했던 느낌도 얘기한다. “한 분씩 스튜디오에 모시고 그분들이 평생 간직해온 그대로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순간이다. 카메라 뷰파인더로, 렌즈를 통해 그분의 눈을 마주하면 그 눈 속에서 세월을 느낄 수 있다. 모든 군인은 위대하지만, 전투를 겪은 용사들에게서 나는 특별한 눈빛을 읽어낸다.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전투의 흔적. 그것은 여전히 뜨겁고 치열하다.”
책은 절망적인 사건이나 끔찍한 장면을 나열하는 기존 전쟁사 이야기를 따르진 않는다. 교과서에서 보았던 지루하고 딱딱한 전쟁사와도 다르다. 영웅의 후일담 혹은 꼰대의 ‘나 때는’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한국전쟁의 마지막 미군 포로’ 윌리엄 빌 펀체스의 삶처럼 참전용사의 전쟁과 사랑 이야기는 한 편의 드라마다.
한국전쟁으로 헤어진 첫사랑을 40년 만에 다시 만난 영국인, 전쟁 당시 도움을 준 카투사 전우를 찾기 위해 20년 후 한국을 다시 찾아 신문광고를 낸 미국인…. 그들은 모두 참전용사였다.
저자는 참전용사를 ‘전투의 공간’에 덩그러니 세워놓지 않는다. 세심하고 꼼꼼한 인터뷰로 그들의 삶을 ‘한 명의 인간’으로서 더 폭넓게 조명한다. 참전용사들을 뒤덮었던 전쟁의 그림자 사이에 마치 숨은 한 줄기 빛을 발견하는 것처럼. 특히 도드라진 ‘인간적인’ 메시지는 독자의 삶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스며든다. 삶의 온기가 느껴지는 이 기록들에서 잊힌 영웅, 잊힌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를 깨달을 터이다. 또한 전쟁 같은 일상에 치여 잊어버렸던 소중한 가치를 발견할 것이다. 우애, 자유, 웃음과 눈물 그리고 소중한 사람까지.
저자는 왜 참전용사의 사진을 찍을까? “그들을 웃게 하고, 그들의 자부심을 지켜주려고 합니다.” 이게 그의 답이다.
저자는 오늘도 새로운 역사를 발굴한다. “나는 이 프로젝트를 언제쯤 마칠 수 있을까. 아직도 숱하게 남아 있을 한국전쟁 참전용사분들을 모두 찾아뵈어 사진으로 기록할 수 있을까? 비록 완수하겠다고 장담은 못 하지만, 힘닿는 데까지 해야겠다는 다짐은 나날이 커지고 있다. 나는 오늘도, 카메라를 들고 새로운 역사를 찾아 나선다.” 라미 현 글·사진/마음의숲/356쪽/1만 6000원.
정달식 선임기자 dosol@busan.com
정달식 선임기자 dosol@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