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삼의 타초경사(打草驚蛇)] 바람, 바람,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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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대 자유전공학부 특임교수

올해는 현대 한국 모더니즘 시학의 종장, 김수영의 탄생 100주년이다. 한국 현대시가 100년을 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의외로 그는 전통적인 시인이다. 그의 시 바탕에는 유교가 깔려 있다. 그의 초기작이 ‘공자의 생활난’인 것은 상징적이다. “이 시에서 시인의 길이 군자의 길과 동일시된다. 김수영의 정신적 고향이 모더니즘보다는 동아시아 전통에 있음을 말해 준다. 이쯤 되면 김수영의 위대함을 단순히 서양의 모더니즘을 한국적으로 소화해 냈다는 점에서만 찾기 어려워진다. 차라리 동서의 정신이 만나는 미래의 접점을 찾으려 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김상환 교수)


공자의 바람은 상호 공존과 생명의 ‘화풍’

장자는 스스로를 낮추는 혁명적인 ‘덕풍’

이준석, 전통에 뿌리 둔 혁신의 바람이길


말년에 남긴 대표작 ‘풀’은 유교 사상을 되살린 작품이다. 거기서 그는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제2연)라고 노래한다. 이 시는 논어의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로 바람이 스치면 풀은 눕는다’에서 비롯한 것이다. 다만 공자가 ‘바람’을 주제로 삼았다면 김수영의 주제는 ‘풀’이다. 바람의 지배에 눌리다가도 먼저 고개를 쳐드는 저항의 정신을 ‘민초’에서 발견한다.

그가 왜 4·19에 그토록 환호했는지 그리고 왜 그다지 5·16에 절망했던지를 이 시는 잘 보여 준다. 김수영의,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은 신동엽 시인의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의 하늘로, 윤동주 시인의 ‘별에 스치우는 바람’에까지 닿는다. 윤동주의 바람은 놀랍게도 맹자로 거슬러 오른다. 널리 알려진 ‘서시’의 부끄러움, 곧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속에는 ‘우러러 하늘에 부끄럼이 없고, 굽어보아 사람에게 부끄럼이 없는 것이 군자’라는 맹자의 지식인론이 깊숙이 박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 현대문학사는 유교의 ‘바람’을 타고 놀았다.

아! 공자의 바람은 꼭 이즈음 초여름의 산들바람과 같다. 나뭇잎과 풀잎을 따뜻하게 감싸면서 서늘한 기운을 불어넣어 생명력을 고양하는 화풍(和風)이다. 그의 바람은 지방 향교들의 문루에 ‘풍화루’라는 이름으로 남았다. 학교에서 배우고 닦은 덕치의 리더십으로 백성을 화목케 하라는 교시다. 그러나 화목은 쉽지 않다. ‘화이부동’이라는 말이 그 어려움을 잘 요약하였다. 부동은 ‘같지 않다’라는 뜻이므로 화목은 서로가 다르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즉 다양성을 감안하면서 공존을 이룬 것이 화풍이다. 폭풍이나 질풍이 일방적이라면 화풍은 상호적인 것이며 또 그만큼 성취하기 어렵다는 점을 이해해야, 왜 학교의 문루에 풍화(風化)라는 이름을 달았는지도 알 수 있다. 공자의 학교는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함께 더불어 사는 방법을 모색하는 곳이다.

장자도 바람을 탄다. 다만 그의 것은 회오리바람이요 태풍이다. 회오리바람에 몸을 띄워 태풍을 타고 올라 거침없이 남쪽으로 날아가는 장쾌한 장자의 문학은, 실제로는 정치학이다. 북쪽 바다의 물고기 씨알에서 변신한, 몸길이가 수천 리에 달하는 거대한 붕새를 띄워 수만 리 남쪽 바다로 싣고 가려면 대단한 부양력이 필요할 터. 장자의 바람은 폭력으로 지배해 온 권력정치를 민중들의 마음을 결집한 덕의 힘 곧 덕력(德力)으로써 혁명하려는 바람이 깃든 것이다. 노자가 덕을 논하여 〈도덕경〉을 저술하고, 장자가 덕을 중시하여 ‘덕충부(德充符)’를 가설한 까닭이다. 장자의 덕풍은 위가 아니라 밑에서 비롯하며 기압이 낮을수록 더욱 강한 힘을 잣는 아이러니한 바람이다. 곧 스스로는 낮추고 상대방은 높여서 낙차를 늘일수록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덕풍이요 그 바람을 타고 천하를 혁신하는 정치가가 장자의 대붕이다.

최근 한국 정치판에 새바람이 불었다. 야당 대표 이준석 선출로 인한 바람이다. 한국 정치의 세대교체, 구태의연한 보수 정당을 혁신할 신세대 바람이라며 조야의 관심을 끌고 있다. 참신한 만큼 낯선 인물이기에 그가 펼칠 바람이 어떤 것일지는 아직은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이력을 일별할 때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눈길을 느낄 수 있다. 능력주의니 남성 중심주의 등이 그렇다. 젊은이 특유의 다변과 경쾌함이 막상 경박함과 경망함으로 떨어질 것 같은 염려도 있다. 연령으로 헤아리는 젊음은 시간의 흐름에 스러지게 마련이다.

이준석의 바람이 잠시 스치다 흩어져 버리는 일진광풍이 아니라 이 땅의 전통에 뿌리를 둔 혁신의 바람이길 기대한다. 이를테면 공자의 화풍이 상호적이라는 점, 장자의 덕풍이 스스로 낮추는 겸양에서 비롯하는 점이 그렇다. 화풍과 덕풍은 이 땅의 ‘바람 정치학’의 골간이다. 위에서 내리누르는 폭풍이나 질풍은 언제나 김수영의 ‘먼저 눕지만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민초들의 저항에 봉착하는 곳이 이 땅임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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