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식의 인문예술 풀꽃향기] 클라라 슈만의 편지
전 고신대 총장
“덧없는 인생에 더없는 양념.” 조선 시대부터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내로라하는 수장가들이 많았지만 조선백자라면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는 않는 수정(水晶) 박병래 선생이 고미술품 수집에 대해 한 말이다. 그가 양념으로 모은 주옥같은 조선백자들이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2층 그의 기증관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이 아름다운 표현을 알기 오래전부터 나도 모으는 일에는 상당한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유학을 가기 전에는 고서를 모으다가 독일로 간 이후에는 주말 벼룩시장을 찾아다니며 세월에 빛바랜 낯선 물건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내 손에 들어온 잡다한 옛 물건들 가운데 과거 유명 인사들의 편지나 엽서가 더러 있다. 그중에 음악사의 가장 빛나는 여성 음악가인 클라라 슈만의 편지 한 통이 있다. 지금은 독일의 ‘슈만 편지 아카이브’에 No. 219730로 버젓이 등재되어 있는 이 편지는 클라라가 1876년 4월 런던에 체류할 때 쓴 것으로 그때나 지금이나 런던의 대표적인 부촌인 하이드 파크 게이트 15번지에 살고 있으면서 콜레스힐 스트리트 9번지에 살고 있던 리틀턴 여사에게 보낸 것이었다. 편지의 내용은 갑자기 잡힌 리허설로 인해 약속한 만남을 금요일로 연기했으면 하고 자기 집에 올 때 그녀의 조카로 하여금 모셔달라고 하면 좋겠다는 제안이다.
글로 나눈 사랑과 우정 영원히 남아
손 편지 쓰는 일 멈춰 버린 현대인
얼마나 많은 미덕을 잃어버렸는지…
이때가 세기적인 이 여성 음악가의 후반기 생의 중간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20년 전인 1856년, 사랑하던 남편 로버트 슈만을 먼저 떠나보냈고 20년 후인 1896년도에는 본인도 세상을 떠나게 된다. 남편과 사별 후 클라라는 작곡보다는 음악 연주와 순회 연주회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이 편지를 쓴 1876년에는 주로 런던에 체류하며 콘서트를 열고 있었다. 두 해 전에 발생한 류머티즘, 관절염, 난청으로 공연도 제대로 못하고 심지어 팔이 아파 편지조차 쓰기 어려웠던 그녀에게 이 시기는 재기의 해라고 할 수 있다. 연초 베를린에서 지인들에게 연하장을 보낸 후 런던으로 와서 공연도 하고 보고 싶은 이들에게 다시 편지를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만년필로 쓴 그녀의 필체는 자유자재의 달필로 마치 화선지에 음표를 그리듯 춤을 춘다. 이 편지를 쓰던 바로 그날 클라라는 거의 반년 만에 솔메이트 브람스에게도 편지를 쓰고 있다. ‘친애하는 요하네스에게, 팔이 아파 오랫동안 당신에게 편지를 쓰지 못했어요. 하지만 어제 내가 어떤 즐거움을 누렸는지 당신께 말하기 전에는 오늘 쉴 수가 없군요. 우리는 당신의 F단조 5중주를 연주했고 그것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나는 다시금 이 작품에 완전히 빠져들었는데, 정말 놀랍도록 감동적인 작품입니다! 당신의 영원한 친구 클라라.’
전화나 이메일이 없던 그 시절, 떨어진 이들과 소통하는 방식은 편지가 거의 유일했다. 특히 슈만과 클라라는 누구보다 많은 편지를 남겼는데, 아카이브에 등재된 클라라의 편지만도 무려 2000여 통에 달한다. 이는 아마 역대 예술가의 유묵으로는 가장 많은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그 많은 편지들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어린 시절 라이프치히에서 같은 교회에 다니며 60년을 교제한 리스트의 두 딸과 주고받은 것들과, 또 자기보다 열네 살이나 어리지만 평생 사랑과 우정의 관계를 오간 브람스와 주고받은 편지이다. 1853년 스무 살의 브람스를 만난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수많은 편지들이 오갔지만 1858년까지의 모든 편지들은 다 소각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맏딸 마리에가 브람스로부터 받은 편지를 계속 불태우지 못하도록 어머니를 설득하여 당시 이들의 관계에 대해 알려주는 몇 개의 편지가 내려오고 있다.
특히 슈만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클라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브람스는 ‘당신이 무한히 사랑스럽고… 당신의 편지들은 내게 당신의 키스들과 같다’고 토로한다. 비슷한 시기에 클라라는 일기에 ‘하나님은 어려운 시절 내게 브람스를 위로로 보내주셨는데, 그는 세상에 둘도 없는 내 영혼의 남자친구’라고 적고 있다. 이들의 실질적 관계는 여전히 불투명하지만, 하여튼 브람스는 남편의 죽음, 여덟 자녀에 대한 양육 등 인생의 무거운 짐들과 함께 외롭고 힘들게 살고 있던 클라라에게 큰 위로가 된 것이 분명했다. 이런 위로들은 주로 따뜻한 편지로 주어진 것이었다.
이 시대의 빠르고 편리한 소통의 방식들은 우리들에게서 이런 편지들을 앗아갔다. 우리가 편지 쓰기를 멈추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버렸는지 모른다. 은근한 관계의 유지, 기다림의 미덕, 차분한 마음, 문장 작성 능력, 문학적 수사의 아름다움, 수려한 필기를 통한 글쓰기 예술의 멋 등등. 1896년 클라라가 숨을 거두자 11개월 뒤 평생을 독신으로 살던 브람스도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들의 아름다운 선율과 주고받은 사랑의 편지들은 영원히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