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이 방아쇠를 당겼다…M16 총알이 무사히 발사되자 가슴이 벅차 올랐다"

임원철 선임기자 wcl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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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국방 인in人] 2. M16 생산 주역 정승구 사장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중신유한공사 정승구 사장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중신유한공사 정승구 사장

“박정희 대통령이 M16 소총을 발사한 후 눈시울을 붉혔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한 최초의 소형화기 M16 개발 주역 중 한 명인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중신유한공사 정승구(78) 사장은 1973년 6월을 회상하면서 또다시 감격스러워했다.

당시 국방부 조병창 품질관리과장을 맡고 있었던 그는 박 대통령의 조병창 M16 소총 생산 공정 시찰과 사격시험 브리핑 등을 담당했다. 철통같은 경호 속에서 박 대통령에게 생산 공정을 설명한 다음 사격 실험실로 안내했다. 박 대통령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브리핑을 마치자 경호원 세 명이 그의 좌우에서 양 팔을 끼고, 뒤에서 허리띠 부분을 잡아 꼼짝달싹 못 하게 했다.

조병창 사격 요원이 준비한 4정의 총기 중 2정을 이용한 단발·점사·자동 사격 시험에 들어갔다.

정 사장은 “정말 많이 떨리고 긴장도 됐다”며 “여러 번 검증했지만, 작동이 안 되면 어쩌나 했다”고 당시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총알이 발사되자 정 사장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주위에서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고 저도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드디어 박 대통령이 흰 장갑을 끼고 방아쇠를 당겼다. 박 대통령은 감격하며 관계자들과 악수하고 일일이 포옹하며 격려했다. 정 사장은 “이런 모습을 보면서 다시 뭉클했고, 드디어 해냈다는 자부심도 들었다”고 말했다.


김우중(왼쪽에서 네 번째) 대우그룹 회장을 안내하는 정승구(맨 왼쪽)사장. 김우중(왼쪽에서 네 번째) 대우그룹 회장을 안내하는 정승구(맨 왼쪽)사장.

정 사장이 M16 소총 개발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71년 ‘M16 소총 제조공장 도미(渡美) 훈련 기사 모집’에 참여하면서다.

수백 대 1의 경쟁을 뚫고 당당히 입사한 정 사장은 국내에서 6개월간 영어 공부를 마친 후 1972년 3월 27명의 도미 기사들과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이들은 미국 텍사스 국방어학원(DLI)에서 언어연수를 마친 후 콜트사로 갔다.

여기서 정 사장은 알루미늄 탄창과 스탬핑 관련 부품 5가지를 맡았다. “조병창에 들어오기 전에 국내 가전공장 스탬핑 분야에서 일했기 때문에 기술 습득에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미국 측에서 붙여준 기술 사수의 인종차별에 힘들었다”며 “‘김치’ 등 인종차별적 발언과 한국을 비방하는 말에 격분해 크게 싸워 공장을 발칵 뒤집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정 사장은 결국 기술 사수를 두 번이나 교체한 끝에 한국에 대해 잘 아는 해군 장교 출신인 뉴욕 경찰서 중범죄팀장 록크웰을 세 번째 사수로 받아 기술 습득을 마쳤다. 1973년 1월 정 사장 등 27명의 도미 기사들은 기술 사수와 함께 귀국했다.

귀국 후 도미 기사들은 총기 제작 관련 장비를 도입한 후 장비 설치, 성능 시험, 제품 제작·조립 등에 들어갔다.

정 사장은 “M16은 126개의 부품이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작동되기 때문에 정밀할 뿐 아니라 고온과 충격에도 견딜 수 있어야 했다”며 “특수알루미늄으로 제작해야 하는 M16 탄창도 마모가 심해 송탄 등에 문제가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맡은 부품 때문에 총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까 봐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정 사장은 주말을 반납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문제점 개선에 나섰다. 이 때문에 식사 시간도 여러 번 놓쳤다.

정 사장은 “열처리를 다시 해 철과 같은 성질이 나오도록 하고 마모를 막기 위해 도면을 수정했다”고 말했다. 정 사장을 비롯해 27명의 도미 기사들이 각고의 노력 끝에 각자의 부품을 완성, 드디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소형화기 M16 소총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정승구(맨왼쪽) 사장이 1985년 미국총기협회 관계자들의 방문 때 기념촬영. 정승구(맨왼쪽) 사장이 1985년 미국총기협회 관계자들의 방문 때 기념촬영.

정 사장은 “ M16 소총 수백 정을 생산했을 때 박 대통령이 직접 부산 기장군 철마에 있는 공장을 시찰한다는 소식을 듣고 바짝 긴장했다”며 “그동안 개발한 수백 종의 총기 중 노리쇠 등을 점검한 뒤 우수 총기 4정을 준비했고, 무사히 사격 시험을 마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M16 소총은 양산에 들어가 보급되기 시작해 1978년까지 5년 동안 60만 정을 생산했다.

정 사장은 이후 M16 소총 탄창 클립 국산화에도 기여했다.

정 사장은 “당시 실탄을 한 번에 삽탄할 수 있는 탄창 클립(CLIP)을 수입하고 있었는데 이를 국산화하는 데 기여했다”며 “이런 공로로 보국훈장 삼일장을 받았다”고 말했다.

정 사장은 조병창 민영화 이후 대우정밀공업 생산기술부장과 공장장, 해외영업본부장(이사)을 거쳐 중국 웨이하이대우자동차유한공사 법인장을 끝으로 직장생활을 마무리하고 중국 웨이하이중신유한공사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정 사장은 “당시 도미 기사들은 대부분 가정을 가진 사람들이었는데 애국심과 열정 하나로 총기 생산에 매진했다”며 “저도 총기 개발 때문에 부모 제사와 자녀 출산, 아들 결혼식 때 가장의 역할을 제대로 못 했는데, 이를 이해해준 가족들에게 항상 미안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 사장은 이어 “군의 병기 중 가장 기본인 소형화기는 국가의 상징으로 여겨진다”며 “소형화기 기술을 축적하고 더욱 발전 시켜 국가 안보를 강화했으면 한다”고 마무리했다.


요산 김정한 선생은 1973년 11월 29일 국방부 조병창 건립 기념 비문에 이렇게 새겼다. '국방은 한 나라의 존립을 보장하는 최대의 요건. 방비를 등한히 해 외적의 침략을 받았던 치욕스러운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 말자. 여기 자주국방을 다짐하는 무기 생산의 터전을 마련했다. 우람한 가동 소리는 조국의 영원한 안전과 자유를 굳건히 보장하리라.' 선생의 말씀을 축약했지만 대한민국 자주국방의 시원이 부산 기장군 철마면 전 국방부 조병창이다. 조병창은 (주)대우정밀로 민영화한 뒤 현재 SNT그룹(회장 최평규)의 SNT모티브로 발돋움했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자주국방의 대의는 면면히 이어진다. 그 거룩한 여정에 묵묵히 복무한 이들을 발굴해 <부산일보>는 ‘자주국방 인in人 시리즈’를 지면과 온라인에 연재한다. 모든 영웅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를 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는다.



임원철 선임기자 wcl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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