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열정과 열정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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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진 지역사회부장

‘함께 뉴스를 보는 게 아니었다. 잘못 나온 정치 이야기로 오랜 만에 만난 가족끼리 언성을 높였다. 아예 다른 집처럼 정치를 암묵적 금기어로 정해야 할 것 같다.’

가족이 최대 8명까지 모일 수 있었던 추석, 때가 때인지라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를 정치 얘기로 잡친 가족 이야기를 심심찮게 접한다.

바야흐로 대통령 선거철이다. ‘대선 레이스’라는 표현이 말하듯 정치권은 후보 간 경쟁에 모든 역량을 쏟아붓고 있다. 지지자를 초반에 결집시켜야 승기를 잡는 후보들은 자신의 장점을 드러냄과 동시에 다른 후보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유튜브 1인방송을 포함한 언론은 경마 중계하듯 여론 조사 결과와 후보 간 검증(또는 흠집내기) 보도를 이어가고, 지지자들은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뉴스만 골라 SNS로 퍼뜨린다. 성향이 유사한 사람끼리 정보를 주고받으며 기존 성향이 더 강화되는 ‘에코챔버 효과’가 발휘된다. 이 효과의 주요 무대였던 SNS는 이제 언론까지 잠식하고 있다. 냉철한 공론장 역할보다 독자의 터치를 부르는 화제성 뉴스와 확실한 충성 구독자층을 더 많이 확보해야 언론사는 수익을 올린다. 점점 높아지는 ‘공론장 장벽’의 구조적 원인이다. 서로 다른 이념과 철학을 가진 사람끼리 이성적으로 토론하기 어려운 사회, 우리 정치와 여론 양극화는 이렇게 조금씩 굳어지고 있다.

공론장 휘어잡은 에코챔버 효과
이익 노린 정치·언론이 근본 원인
부동산·주식 광풍 시민 삶도 포획

옹졸한 반항 반성한 김수영 시인
근원적 분노 대상 잊지 않길 바라
냉철함 기르는 공부에 영화 제격


주도 세력의 이익 관점을 살짝 벗어나면 이번 대선에 대해 승패와 당락을 벗어난 다른 질문이 가능하다. 코로나19 대위기와 기후변화, 남북 평화공존, 일자리·주거·노후 불안, 수도권 집중과 지방 소멸…. 국가가 이 시점 힘 쏟아야 할 이런 숱한 과제를 정치권은 제대로 토론하는가, 언론은 이런 의제를 제대로 설정하고 평가·검증하는가, 대선 불과 석 달 뒤 지방선거는 이렇게 잠잠하다가 그저 대선에 휩쓸려 떠내려가듯 치러도 좋은가.

이익 관점을 넘어 이런 근원적 질문을 던져야 할 시민들을 향해서도 이익의 그물망이 죄어 온다.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세계적으로 늘어난 통화량 이상으로 자산가치는 급등했고, 상대적 박탈감에 정신이 번쩍 든 사람들이 ‘벼락거지’를 면하려 부동산·주식·코인에 뛰어들고 있다. 산업구조 개편에다 코로나19로 취업문이 더 좁아진 MZ세대를 필두로, 노후가 불안한 오륙십 대 장년층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문득 시인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가 떠오른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옹졸하게 욕을 하고/(중략)/한번 정정당당하게/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후략)’.

김수영은 ‘절정 옆에 조금 비켜서 조금은 비겁하고 옹졸하게 반항한다’고 썼지만, 정작 분노해야 할 대상을 잊지 않았다. 그의 문제의식은 지금도 유효하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세대· 젠더·지역 갈등, 사회적 약자를 향한 배제와 혐오가 설렁탕집 주인과 야경꾼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작은 분개거리를 위장막으로 세우고 근원적 문제는 더 막강해지는 중이다. ‘공정’ 이슈가 덮은 불평등 문제가 대표적 사례다.

예민한 예술인들은 이런 구조를 일찌감치 알아차리고 시, 소설, 노래, 영화, 연극 등으로 꾸준히 경종을 울려왔고, 최근에는 상업적으로도 성공하고 있다. 아카데미와 칸을 휘어잡았던 영화 ‘기생충’, 요즘 세계적 화제작으로 떠오른 국산 넷플릭스 신작 ‘오징어게임’ 같은 작품이 그 예다. ‘오징어게임’은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를 주인공 모델로 삼은 설정에서부터 보는 내내 지옥도 같은 영화와 현실에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가치 있는 삶은 무엇인지 스스로 묻게 만든다.

오늘도 대다수 소시민은 사모펀드 수천 억 돈벌이에 얽힌 정치·법조·언론·금융인 커넥션 뉴스에 분통을 터뜨리다 부동산 시세와 주식 차트, ‘오징어게임’ 사이를 오가며 엉거주춤한 상태로 살아간다. 김수영이 앞선 시에서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고 한 모습과 유사하다. 그러나 시민들이 더 근원적인 분노의 대상을 놓치지 않기를, 시인은 바라지 않았을까. 양극단의 열정에 쉽사리 휩쓸리지 않을 냉철함을 유지하려면 공부가 필요하다. 책도 좋고 영화도 좋다. 바쁜 현대인에게 비교적 짧은 관람 시간과 압도적인 시청각 효과 덕분에 영화는 효율적인 공부 매체다. 영화가 조금 혼란스럽고 불편하다면 굳어지는 인식과 감성에 작은 균열이 나기 시작했다는 청신호다. 마침 다음 주 개막하는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거대한 각성의 장이자 공론장이 될 수도 있겠다. jin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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