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처마 끝 떨어지는 물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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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조선 태종 이방원은 정적 정몽주를 암살하고 동지 정도전을 참살했으며, 피붙이 동생의 목숨을 빼앗고, 4명의 처남까지 모조리 죽였던 인물이다. 그처럼 무시무시했던 이방원조차 어쩌지 못한 인물이 있다. 바로 장남 이제(양녕대군)였다.

이방원은 이제가 모범생이길 기대하며 일찌감치 왕세자로 삼았건만, 정작 이제는 불량하게 행동했다. 사냥과 음주가무는 물론 여색을 밝히며 날을 보냈다. 그 꼴이 보기 싫었던 이방원은 결혼하면 좀 나아질까 싶어 이제를 일찍 장가보냈지만, 이제의 만행은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남의 첩이었던 어리라는 여인을 빼앗아 동거하면서 몰래 아이까지 낳았다. 노한 이방원은 관련자를 처단하고 어리를 궁에서 내쫓으려 했다. 그런데 이제는 반성은커녕 “아버지는 시녀까지 다 궁에 들이면서 나는 왜 못 하게 하냐”며 대들었다. 심지어 “내 여자를 억지로 내쫓으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을 것”이라며 아버지를 협박하기까지 했다. 열이 뻗칠 대로 뻗친 이방원은 이제를 왕세자 자리에서 끌어내리지만, 결국엔 “저 하고 싶은 대로 살게 하겠다”며 체념하고 만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사실이다.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자식 농사
언제나 부모 애를 태우는 존재
서슬 퍼렇던 조선 태종도 체념

정치인에 특히 더 민감한 문제
자식 문제로 고개 떨군 이 많아
결국은 뿌린 대로 거두는 것


마음대로 안 되는 것 중에 제일은 역시 자식이다. <장자>에 요 임금에게 어떤 이가 아들 많이 낳기를 축원하자 “아들 많아 봤자 걱정거리만 많아질 뿐”이라며 손사래 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만큼 자식은 애물, 즉 부모의 애를 태우는 물건이다. 정치하는 사람에겐 특히 더 그렇다. 자식 때문에 고개를 떨군 정치인이 숱하다.

영국 수상으로서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윈스턴 처칠의 자식들은 알코올 중독자였다. 맏아들은 평생 술에 절어 살았고, 배우였던 둘째 딸은 술 때문에 수시로 사고를 쳐 뉴스거리를 제공했다. 2000년 미국 대선에서 조지 부시에게 패한 앨 고어 전 부통령의 아들 역시 마약과 알코올 중독자였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아들 헌터 바이든도 수십 년간 마약과 알코올 중독에 시달린 사실이 알려지면서 지난 대선 과정에서 아버지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다.

멀리 볼 것 없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 씨는 1997년 한보그룹 정관계 로비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 현직 대통령의 아들이 구속된 첫 사건이었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은 결국 국민에게 사과해야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아들들로 인해 국민의 용서를 구해야 했다. 삼남 홍걸 씨가 이른바 최규선 게이트로 구속됐고, 차남 홍업 씨는 기업 이권 청탁 관련 돈을 받은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았다. 2002년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생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렇게 참담한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조차 못 했다”며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에도 자식 문제로 구설에 오른 정치인이 줄을 이었다. 아들의 마약 투약 문제로 정계를 떠난 이도 있고, 대권 주자로 거론될 정도로 유력 정치인으로 주목받던 이들이 자녀의 군 입대나 복무 중 휴가, 입시 등에서의 특혜 논란 등으로 낙마하는 경우도 많았다.

최근에는 국민의힘 장제원 의원의 아들 용준 씨가 차량 사고를 낸 후 음주 측정을 요구하는 경찰관을 폭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일이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자 장 의원은 “자식 잘 못 키운 아비”라며 사죄했으나 사회적 비난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장 의원을 향해 국회의원직에서 사퇴하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용준 씨는 2019년에도 술에 취한 상태로 차를 몰다가 사고를 낸 뒤 운전자를 바꿔치기한 혐의로 기소돼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바 있다.

국민의힘 곽상도 의원의 아들 병채 씨가 성남시 대장동 개발 시행사인 화천대유에서 불과 6년 일한 뒤 퇴직금으로 50억 원을 받아 정치판은 물론 나라 전체가 들썩일 정도로 논란에 휩싸이자 곽 의원이 지난 26일 전격 탈당하는 일도 일어났다. 화천대유 관련 사안이 아들을 방패막이로 이용한 것인지 아니면 온전히 아들 개인의 문제인지는 차후 밝혀져야 하겠지만, 어쨌든 적어도 현상적으로나마 아들로 인해 곽 의원은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맞은 셈이다.

“정치보다 더 어려운 게 자식 농사”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닌 것이다. 뉘 집 할 것 없이 어려운 게 자식 농사인지라 안타까운 마음으로 동정의 시선을 보내는 이도 없지 않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어긋난 자식들의 이면에는 뒤틀린 부모의 욕망이 숨어 있기 마련이다. 착한 사람은 착한 자식을 낳으며, 못된 인간은 못된 자식을 낳는 법이다. 이런 이치를 못 믿겠다면 비 온 뒤 처마 끝에 떨어지는 물을 보라고 했다. 방울방울 떨어져 내림이 한 치 어긋남이 없다는 것이다. 명심보감에 나오는 가르침이다. 결국, 자식 탓만 할 게 아니다. 자식 또한 뿌린 대로 거두는 존재인 것이다.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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