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책 읽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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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정 소설가

소설을 쓴다고 하면 사람들은 당연히 내가 책을 많이 읽는 줄 안다. 그러면 나는 조금 부끄러워진다. 사실 나는 책을 늘 읽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고, 아직 읽지 못한 길고 긴 독서목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내 주변에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 한 사람 있기는 하다. 그는 일주일에 다섯 권에서 일곱 권 정도의 책을 읽는다. 주로 소설을 읽고 역사소설을 좋아한다. 그는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책을 읽었는데 그게 그의 인생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책에서 인생을
배웠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사람이 책에서 뭘 굳이
배우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어쩌면 이제 책이 그의 인생을
읽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지난주 그는 도서 대출량이 월등히 많은 사람에게 주는 상을 받았다. 파란색 벨벳으로 된 상장과 도서상품권 세 장을 받아 그는 내게 줬다. 책을 사보라고 했다. 나는 나도 한 번도 못 받은 상을 받아서 좋겠다고 소설가는 당신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우리는 코로나로 시상자들만 참석한 시상식에서 나눠준 다과 봉지를 뜯어 도서관 앞마당에서 나눠 먹었다.

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고 했다. 그 시절에는 책이 귀했으니까 봤던 책을 여러 번 봤다고 했다. 보고 또 보고 책을 보다 맞기도 했다고 했다. 소를 끌고 산에 올라 양지바른 무덤에 누워 책을 보고 내려오면 어느새 저녁이었다고 했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간 줄 모르게 재밌었다고 했다. 하지만 책보다는 농사일이 우선이었고 책은 밥이 되지 못한 시절을 살았다고 했다. 그의 어머니는 책을 읽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 그 시간에 일을 좀 더 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학교를 더 다니지 못했고 일찍이 돈을 벌어야 했다.

그는 나중에 가정을 이루고도 책을 좋아했는데 이때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는 텔레비전 브라운관을 만드는 회사에서 일했다. 삼교대로 일을 해야 했기에 주로 밥상머리에서 책 대신 신문을 읽었다. 이때도 그는 아내에게 자주 타박을 들었다. 어쩌다 쉬는 날이면 자전거에 큰딸을 태우고 책 대여점에서 책을 빌려왔다. 책 욕심이 넘쳐 보조 의자에 여러 권의 책을 실어 묶고 그 위에 딸을 앉혀 돌아왔다고 했다. 덕분에 가는 길에 그의 허리를 잡고 갔던 딸은 돌아오는 길에는 그의 목을 잡아야 했다. 책 덕분에 세상의 키가 높아진 딸은 즐거워했다고 했다.

그의 딸 이름도 책에서 나왔다. 무협지 속에서 아주 많은 남자로부터 사랑을 받는 낭자의 이름이었다. 크는 내내 딸은 그게 불만이었다. 중국 무협지 속에 등장했던 주체성 없고 전근대적인 여성상이 투영된 이름이 싫었다. 그게 싫어서 남자들을 자주 기다리게 하고는 고소해 했다.

더 나이가 들어서 책은 점점 그의 인생에서 멀어졌다. 시간이 날 때는 텔레비전을 봤다. 밤늦도록 텔레비전을 켜놓고 잠드는 날도 많았다. 퇴직하고 시간이 범람한 물처럼 넘쳐날 때 남자는 딸로부터 뜻밖의 말을 들었다. 책이라도 좀 봐요. 술 좀 그만 마시고. 평생 누군가가 그에게 책 읽기를 권하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딸은 몰랐다. 그는 눈이 나빠져 작은 글씨를 읽기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의 책 선택은 단순하다. 글자가 되도록 크고 누군가의 한 생애처럼 긴 내용일 것. 그는 소설을 쓴다는 딸에게 단편보다는 장편을 쓰라고 말했다. 자신이 가진 시간에 비해 요즘 소설은 너무 짧다고 말이다. 일주일 정도 넉넉하게 읽고 빠져들 수 있는 이야기를 쓰라고 했다. 같은. 같은. 같은. 내가 아는 그 사람은 딸에게 그런 재주가 있는 것처럼 말한다. 딸은 자신에게 그런 재주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알겠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책에서 인생을 배웠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사람이 책에서 뭘 굳이 배우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어쩌면 이제 책이 그의 인생을 읽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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