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 붉게 물들인 '꽃' 무리 지어 더 붉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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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직지사 꽃무릇

15년 전 몸과 마음을 잠시 달래기 위해 경북 김천 직지사에서 거의 하루를 보낸 적이 있었다. 정말 정결하고 차분하고 아름다운 사찰이었다. 김천시가 직지사 주변에 심어놓은 꽃무릇 21만 포기가 최근 활짝 피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오래 전의 추억이 떠올라 단걸음에 직지사로 달려갔다. 부처의 미소를 받으며 무릉도원처럼 꽃의 천국이 만개해 있었다.

산책로 선홍빛 꽃무릇 21만 포기 ‘활짝’
한 송이론 볼품없지만 무리 지으면 황홀
사명대사 출가한 직지사, 단정하고 깔끔
210자 게송 담은 미로 지나며 깨달음도


■꽃무릇

‘들끓는 그리움/쏘아올린 폭죽/사랑은 무릇 저토록/애절해야 하느니라’(이원천 ‘꽃무릇’ 중에서)

직지사 산문과 매표소를 지나자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 숲 사이로 화려한 선홍빛 꽃밭이 눈을 부시게 한다. 절 주변의 산기슭이나 풀밭에서 무리를 지어 자란다는 꽃무릇이다. 무리를 지어 피는 꽃이라고 해서 꽃무릇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전국 주요 고찰 주변에는 꽃무릇 군락지가 많다. 이것은 꽃무릇의 알뿌리 때문이다. 알뿌리에는 방부제 성분이 있다. 옛날에는 알뿌리를 갈아 풀에 섞어 경전을 묶거나 탱화 천을 바를 때 사용했다. 이렇게 하면 좀이 슬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꽃무릇 알뿌리를 사용하지 않는다.

꽃무릇 군락은 절 입구인 만세교까지 이어지는 산책로를 따라 조성돼 있다. 잎이 우거진 나무 그늘 아래에 자리를 잡은 붉은 꽃과 연녹색 줄기는 산책객들의 마음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하다.

가만히 살펴보면 꽃무릇은 참 특이하게 생긴 꽃이다. 꽃 한 송이만 보면 그렇게 예쁘지도 않다. 오히려 SF영화에 나오는 괴물처럼 희한하게 보이기도 한다. 꽃술은 꽃잎보다 길게 삐져나와 있다. 길고 가느다란 줄기는 마늘종처럼 초라해 보인다. 이파리는 하나도 없이 맨살뿐이다. 발가벗어 부끄러운 탓에 꽃이 저렇게 불그스레한 것인가.

하지만 한걸음 뒤로 물러나 나무 그늘 아래에서 무리를 지어 자라고 있는 꽃무릇을 보면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세상에 이렇게 황홀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꽃 군락이 어디 있을까.

꽃무릇의 경우 꽃이 먼저 피었다가 진 다음에 잎이 생겨난다. 절대 만나지 못하는 꽃과 잎이 서로 너무 그리워한다고 해서 대개 ‘상사화(相思花)’라고도 불린다. 그래서 꽃무릇은 이루어질 수 없는 슬픈 사랑을 상징한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상사화와 꽃무릇은 엄연히 다른 꽃이다. 사람들이 비슷하게 생긴 상사화와 꽃무릇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고 있을 뿐이다. 상사화는 여러 종류이지만, 꽃무릇은 한 종류뿐이다. 하지만 꽃무릇이라고 부르든 상사화라고 부르든 이름이 무어 그리 중요하랴.

꽃무릇 꽃대는 9월 초순에 올라온다. 꽃은 9월 중하순이면 절정을 이룬다. 꽃무릇은 한꺼번에 무더기로 피어나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구경하러 가는 날을 제대로 고르지 않으면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헛걸음만 할 수 있다.



■직지사

꽃무릇 군락을 지나 숲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간다. 약 200m 정도 거리여서 힘들 정도는 아니다. 숲이 우거진 산책로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쉬엄쉬엄 걸어도 4~5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풍경 하나하나를 눈에 담기 위해 천천히 걷는다. 절을 감싸 안은 황악산이 나그네 곁에서 나란히 동행이 돼 준다. 곳곳에서는 깊어가는 가을이 가슴 아프게 느껴진다.

직지사는 418년 아도화상이 창건한 사찰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방화 때문에 모든 건물이 소실됐지만 1602년부터 중창하기 시작해 60년 만에 완전히 복구됐다. 직지(直指)라는 이름은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선종의 가르침에서 유래했다. ‘누구나 가슴에 불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교리를 공부하거나 마음을 다스리면서 수행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직지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 나서 큰 공을 세우면서 나라를 구한 밀양 출신의 사명대사가 출가한 곳이다. 이곳에는 부모를 잃고 방황하던 사명대사가 출가하기 전에 누워서 잠들었다는 바위와 사명대사의 자취를 기리는 사명각이 있기도 하다.

직지사는 조용하면서 깔끔하고 단정한 사찰이다. 큰 사찰인데도 화려하거나 요란하지 않고 차분하다. 가람이 한두 채가 아니지만 복잡하거나 지저분하거나 어지럽지 않다. 대웅전, 명부전, 비로전 등 모든 가람과 탑, 마당은 제자리를 잘 찾아 차분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절 주변을 둘러싼 산의 숲뿐 아니라 절 안에도 곳곳에 적절하게 수풀이 조성돼 있어 눈을 시원하게 해 주고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준다.

대웅전과 비로전을 거쳐 절을 천천히 한 바퀴 둘러본다. 어찌된 노릇인지 사찰이라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다. 아담하면서 우아하고 차분하면서 경건한 기분이 심신을 가볍게 만들어 준다. 머리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어 있지 않고, 가슴에는 어떤 느낌도 다가오지 않는다.

입은 굳게 닫힌 채 가벼운 미소만 띠고 있고,귀는 곳곳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와 새 소리만 들을 뿐 다른 잡다한 소리는 흘려버린다. 코로는 담담한 가을 향기가 흘러간다. 도시에서 맡을 수 있는 인위적 냄새는 단 하나도 없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나무와 구름과 시들어가는 잡초뿐이다.

직지사에는 어울리지도 않는 건물을 무리하게 추가로 지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교육 등을 위해 새로 지은 건물은 과거부터 전해 내려오던 가람과 분리해 다른 곳에 만들었다. 게다가 새로 지은 건물은 주변 경관을 완벽할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해 어수선하거나 지저분하게 보이는 경우는 전혀 없다.

사찰이 꽤 넓고 길기 때문에 단순히 돌아보는 데에도 꽤 시간이 걸린다. 이곳저곳에 들어가 부처에게 인사를 드리고, 가끔 쉼터 벤치에 앉아 맑은 공기를 마시려면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직지사 여행의 마무리는 신라시대 의상대사의 법성게를 담은 미로 ‘화엄일승법계도’다. 의상대사는 화엄경의 방대한 가르침을 210자의 게송으로 줄여 법성게를 만들었다. 그는 법성게를 미로 같은 도장 모양으로 만들었다. 화엄일승법계도는 의상대사의 ‘도장’을 땅에 화원 모양 미로로 재현해 놓은 곳이다. 한 번 들어가면 210자의 게송을 모두 지날 때까지는 절대 나올 수 없다. 부처의 마음으로 법계도를 따라 걷다 보면 스스로 마음속의 불성을 발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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