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덧없는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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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한산하고 스산한 도로를 달리던 자동차 한 대가 속도를 줄인다. 운전자는 자동차 두 대가 충돌한 사고현장을 목격하지만 현장을 유유히 지나친다. 음산한 기운이 느껴지는 오프닝. 언제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교통사고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사건은 무엇 하나 분명하지 않다. 사고현장을 목격한 이는 누구인지, 왜 그는 구조작업을 하지 않고 지나쳤는지, 교통사고의 운전자들은 어떤 상태인지, 혼란과 불확실의 세계로 문을 여는 영화 ‘빛과 철’이다.

‘희주’는 결혼 전 일하던 공장에서 다시 일을 하기 위해 2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생의 의지를 잃은 듯한 희주의 얼굴은 어떤 전사가 숨겨져 있음을 느끼지만, 영화는 아직 비밀을 밝힐 의지가 없어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희주는 거리에서 ‘영남’을 발견하고 불안에 휩싸인 얼굴로 달아난다.

배종대 감독 첫 장편 ‘빛과 철’
교통사고 진실 놓고 세 인물 갈등

가해자·피해자 점점 모호해지고
진상 밝혀지려는 순간 영화 끝나
현실적 이야기 대비 환상적 엔딩



2년 전 일어난 교통사고는 두 여자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교통사고 가해자인 희주의 남편이 죽었고, 피해자인 영남의 남편은 의식불명 상태다. 희주는 남편을 잃었지만 영남 가족에겐 죄책감을 느꼈기에 영남을 피했던 것이다. 여전히 불안해 보이는 희주 앞에 영남의 딸 ‘은영’이 나타나, 자신의 아빠는 그날 자살하려고 운전을 했다는 진실을 털어놓는다. 남편이 가해자라고 굳게 믿었던 희주가 요동친다.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고 그녀는 사건의 전모를 파헤치는 데 사활을 건다. 하지만 진실은 찾으려 할수록 모호해지고, 더 깊은 수렁에 빠질 뿐이다.

남편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아니, 죄책감을 덜기 위해 남편의 행적을 추적하던 희주는 남편의 사고에 자신 또한 무관하지 않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희주는 진실에 다가갔지만 현실을 외면하기로 한 듯, 영남에게 그날의 진실을 밝히라 추궁한다. 영남 또한 자신의 남편이 어떤 마음으로 차를 몰고 나갔는지 알고 있었지만 삶을 지키기 위해 침묵을 선택한 인물이다. 영화는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진실을 찾아가는 미스터리 구조를 취하고 있지만 이제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 중요치 않다. 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상대를 잘 알고 안다고 믿지만 모든 마음이 같지 않다. 다른 마음을 확인하는 순간, 숨겨져 있던 비밀의 정체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누군가는 침묵을, 어떤 이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또 어떤 이는 삶을 내던질 만한 분노를 터트리는 것을 목도한다. 이처럼 영화는 하나의 사건을 대하는 남겨진 사람들의 서사를 차곡차곡 풀어나가며, 또 그녀들을 극한의 상황으로 내모는 여정에 관객을 동참시킨다.

영남의 남편이 눈을 떴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제 진실을 들을 수 있다 믿으며 희주와 영남이 함께 병원으로 향한다. 적막이 감도는 차 안, 느닷없이 고라니 한 마리가 차 앞으로 뛰어든다. 마치 그녀들의 길을 막아서려는 듯, 고라니는 달아나지 않은 채 그녀들을 빤히 바라본다.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던 희주와 영남이 서로를 바라본다. 그렇게 영화가 덧없이 끝난다.

현실적인 이야기에 대비되는 환상적인 엔딩이다. 아마도 그녀들이 병원으로 간다고 해도 진실은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어느 한쪽은 또다시 고통 속에 내던져질 것이다. 모두가 불행해질 수 있는 대답을 들으러 가야만 하는 상황에서 멈추는 것, 배종대 감독이 그녀들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궁금증으로 시작해 끝없는 질문을 남기는 ‘빛과 철’은 인간 내면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집요함과 치밀한 구성으로 이어지는 영화다. 배 감독은 단편 ‘모험’을 연출한 지, 꼭 10년 만에 첫 번째 장편을 세상에 내어놓았다. 오랜 시간이 걸려 만났지만 그 기다림은 헛되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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