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윤석열에게 보이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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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현 편집국 부국장

고건, 반기문과는 달랐다.

정치권에 들어오는 순간 몇 달 견디지 못하고 백기를 들 것이라는 일각의 예상은 보란 듯이 빗나갔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고건, 반기문과 다른 점은 무엇보다 권력의지가 몸에 배어 있다는 점이다.

9수를 해서라도 사법시험 합격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것은 그의 기질을 잘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고건, 반기문과는 다른 윤석열
권력의지, 정치적 감각 몸에 배어
‘반문’ 정서 결집, 대권 유력후보로

‘1일 1실언’ 사회적 약자 무시 일관
이쯤 되면 실언 아닌 철학의 문제
균형발전, 지방분권 정책도 안 보여

박근혜 정부 적폐 수사를 통해 승승장구한 그는 조국 일가 수사로 문재인 정부의 핍박을 나홀로 견뎌내면서 자연스럽게 정치권에 안착했다.

권력의지가 내재되어 있으니 으레 생각하는 검찰 총장과는 달리 정치적 감각도 남달랐다.

국민의힘 한 국회의원의 전언이다. “검찰총장 인사청문회 때 우리 당 의원들이 얼마나 가혹하게 윤 총장을 몰아붙였습니까. 장모 문제까지 포함해 십자포화를 퍼부었잖아요. 자정 넘어서 청문회를 마치고 귀가하는데 모르는 번호가 떠요. 받았더니 윤 총장이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통화에서 윤 총장은 ‘의원님. 제가 평소 의원님을 참 존경해왔는데 좀 살살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앞으로 잘 모시겠습니다’며 특유의 너스레로 친근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해당 국회의원은 윤 총장의 전화를 받은 뒤 ‘이 양반이 언젠가는 정치판에 뛰어 들겠구나’ 하는 것을 직감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뿐만 아니다. ‘검수완박’을 들고 나오자 ‘부패완판’으로 대응하면서 남다른 메시지 전달 감각도 뽐냈다. 그는 문재인 정부와 검찰 수사권 조정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을 빚던 중 “지금 진행 중인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은 부패를 완전히 판치게 하는 ‘부패완판’으로 헌법 정신에 위배된다”며 정면으로 치받았다.

TV 토론에 약할 것이라는 전망과는 달리 “무능해서 죄송하다” “(홍준표 후보가) 두테르테는 아니지 않느냐” “제 공약은 얼마든지 갖다 쓰시라. 공약에 특허권은 없으니까” 등의 발언에서 보듯 시간이 흐르면서 무난하게 적응해 가고 있다.

대통령 출마 선언문에서는 문재인 정부를 향해 ‘권력 사유화’ ‘국민 약탈 정권’ ‘책임의식과 윤리의식 마비’ ‘정권교체 실패는 국민에게 죄를 짓는 것’ 등 예상 수위를 훨씬 넘어서는 강경한 어조로 주변을 놀라게 했다.

그가 정권교체를 갈망하는 반문(문재인)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고 야권 후보 지지율 선두권을 탄탄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을 우연이라고 보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는 문재인 정부와 싸우면서 대권후보로 급부상한 그가 과연 약자의 처지에 관심을 가지는 미래형 지도자 상에 부합하느냐는 것이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검찰 조직의 우두머리까지 지냈으니 비록 사법시험 9수를 하긴 했지만 남들에 비하면 큰 어려움 없이 오늘날 대권 유력 후보의 위치에까지 와 있는 셈이다.

우려스러운 것은 그의 행보와 발언 곳곳에 살아온 이력을 반영하듯 엘리트 의식이 강하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손발 노동은 아프리카에서나 하는 것” “집이 없어서 주택청약 통장을 만들어보지 못했다” “주택청약 통장을 모르면 거의 치매환자” “돈 없는 사람은 부정식품 그 아래도 먹을 수 있게 해줘야 된다.”

‘1일 1실언’이라는 탐탁지 않은 별명을 얻은 그가 정치권 입문 후 쏟아냈던 실언 모음이다.

여러 행사와 토론에 나가다 보면 실언이 있을 수 있지만 그의 실언엔 유독 노동자, 치매환자, 돈 없는 사람, 무주택자 등 사회적 약자들의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는 일관된 흐름이 엿보인다. 이쯤 되면 이건 실언이 아니라 후보자의 살아온 이력이 반영된 철학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또 하나. 그가 국토균형발전과 지방분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서울에서 태어나 초·중·고·대학을 서울에서 나오고 서울에서 주로 살아온 그가 소멸의 위기를 맞고 있는 지방의 현실이 얼마나 절박한가 알리 만무하다. 수도권이 강자라면 지역은 약자일 텐데 이를 치유하고 타개해 나갈 정책 대안이 무엇인지 들어본 적이 없다.

흔히 총선은 과거를 심판하고, 대선은 미래를 준비하는 선거라고 한다. 윤 전 총장이 반문 정서를 업고 야권의 유력 후보로 부상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가 꿈꾸는 미래의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가?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사회적 약자들은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망국적인 수도권 일극주의를 벗어나기 위한 준비된 정책은 있는가?

이런 것에 진정성을 가지고 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는 미래의 지도자 윤석열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jhno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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