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예술이 우리를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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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금아 문화부 부장

해마다 가을이 되면 문화부 기자들은 바빠진다. 전시·공연·행사가 쏟아지고 영화제도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에 밀렸던 것까지 몰려 올해는 더 정신이 없다. 최근 미술 분야에서 사진 전시가 눈에 띄게 늘었다. 한국 현대사진의 거장 고 임응식 작가의 작품이 부산시민회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고은사진미술관에서는 원로 사진가 강운구의 전시가 열린다.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는 영화감독이 아닌 사진가 박찬욱을 만나는 자리도 마련됐다. 이 외에도 갤러리부터 신생 전시공간, 대안공간까지 곳곳에서 사진전 소식이 들려온다.

예술로서 대상을 재해석한 것부터 작가의 철학을 표현한 작품까지. 전시를 통해 소개되는 사진의 결이 다양해서 보는 재미도 있다. 그중 사진의 본질인 기록성을 생각하는 전시가 눈길을 끈다. 생활주의 사진을 주창한 임응식 작가의 사진에는 1940~1960년대 부산·서울의 풍경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부산에서 촬영한 사진에 ‘호텔 미진’이라는 간판이 보여 인터넷에서 찾아보기도 했다. 광복동에 있었던 호텔인 듯하다. 이렇게 사진을 통해 내가 모르는 시절의 도시 부산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강운구 작가는 자신이 카메라로 기록한 문인과 화가 160명의 사진을 선보인다. 김기창, 박경리, 임응식, 장욱진, 최일남, 한창기, 함석헌 등 50여 년간 촬영한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사진이 전시장을 가득 채웠다. 이 사진들 앞에서 한 대학교수는 ‘문학청년’ 시절로 돌아간 듯 즐거워했다. 예술지구P에서 열리고 있는 코로나19 사진 전시회 ‘거리의 기술’은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을 기록했다. 자영업자, 원도심의 독거노인, 유학생 등 코로나로 어려움을 겪는 이웃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전시다.

사진이 보여주는 ‘기록성’ 가치
다큐 ‘미싱타는 여자들’에서 발견
재개발로 사라진 마을 기록까지
시대 기억 품는 우리 곁의 예술

사진이 가진 기록의 힘은 부산국제영화제 커뮤니티비프를 취재하며 본 다큐멘터리 영화에서도 마주했다. 하루에 한 주제를 집중 탐구하는 기획전 데이바이데이에서 ‘리멤버부마: 부마에서 미얀마로’를 주제로 소개한 ‘미싱타는 여자들: 전태일의 누이들’이다. 영화는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분신 사건 이후 결성된 평화시장 청계피복노조 여성노동자 이야기를 다룬다. 13살 어린 나이에 생활 전선에 뛰어든 여성노동자에게 노동운동은 ‘7번 시다’ ‘1번 오야’가 아닌 자기 이름 석 자를 찾아줬다. 한창 배울 나이, 배움이 고팠던 이들에게 새마을노동교실은 해방구였다. 그러니 이들에게 노동교실 확보 투쟁이나 수업에 가기 위해 회사를 상대로 펼친 노동시간 단축 투쟁 등은 당연한 일이었다.

영화에 직접 출연한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는 과거 노조활동 당시 사진과 함께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다. 김정영·이혁래 감독이 공동 연출한 이 영화는 여성노동자를 나약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보는 선입견을 깼다. 당시 그들은 10대에서 20대 초반으로 어렸지만,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용감했다. 구호가 아닌 삶 속에서 우러나오는 노동운동을 펼쳤던 ‘주인공’이었다. 1977년 9월 9일 노동교실 사수 투쟁으로 감옥에 갔다 오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다른 노동자들 마음의 상처를 보듬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어른’이었다. 청계피복노조 교육선전부장으로 언니 역할을 했던 이숙희 씨는 “노동교실 사수 99 투쟁은 제가 주도한 것이 아닌데, 다큐를 찍기 전까지 조합원들은 주도자가 저인 걸로 알고 있더라”며 이번 영화를 통해 진실이 알려졌다고 소개했다. 이 씨는 신순애, 임미경 씨와 다른 조합원들이 함께 ‘우리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이 이번 영화의 가장 큰 성과라고 했다.

영화 후반부 여성노동자들이 과거 자신이 일했던 장소를 찾아가 감회에 젖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그 시절 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마주한다. 조명을 받아 밝게 빛나는 사진을 보며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웃는다. “내가 이렇게 어렸구나” “너 참 고생많았다” “수고했다” “사랑한다” 자신을 향해 말을 거는 여성노동자의 모습에서 사람과 시대를 조명하는 영화의 힘이 느껴졌다. 이 영화는 팬데믹으로 아직 극장 개봉을 못 했다. 하루빨리 개봉을 해서 더 많은 이들이 영화가 기록한 여성노동자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사진이나 영화만 시대를 기록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은 지금 시대와 현상, 그 속에 사는 우리를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륜플레이스에서 진행된 온천장전이 그 한 예이다. 도시 재개발로 사라진 온천장 마을의 이야기를 회화, 설치, 영상 등의 작품에 담아냈다. 이 전시는 현재 F1963 ‘부산 레지던시 대전’에서 볼 수 있다. 마을은 사라졌지만 예술가의 작품 속에 남았다. 예술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스쳐 지나가는 오늘의 어느 순간, 어느 장소를 기록하고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질문을 던지는 것도 예술이 하는 일 중의 하나이다. 예술이 우리를 기록하고 기억한다.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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