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익의 참살이 인문학] 이야기가 밥이고 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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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치의학전문대학원 의료인문학교실 교수

현대의 과학적 의학은 일찍이 어떤 시대에도 꿈꾸지 못했던 엄청난 성과를 이루어 냈다. 하지만 아직 과학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몸의 현상은 많다. 과학적으로 어떤 약효도 있을 수 없는 물질을 투여했는데도 명백한 질병 치유의 효과를 보이는 플라세보(가짜 약 현상)가 그중 하나다. 처음에는 이런 현상 자체를 부정하려고 했다. 가짜 약을 먹고 병이 낫는다고 느끼는 건 마음으로만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가짜 효과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례를 검토한 결과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플라세보로 인한 치유 효과의 물질적 증거를 찾아낸 연구도 적지 않다. 그래서 새로 개발된 약의 효과를 검증하려면, 약을 주는 의사도 먹는 환자도 그 약이 무엇인지 모르게 해야 한다는 연구 규칙이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약에 대한 기대치가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으로 말하면 당연히 없어야 하지만 경험으로는 분명히 있는 현상이다. ‘없지만 있다’는 과학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모순이지만 엄연한 현실이기도 하다. 이렇게 플라세보는 오랫동안 현대 의학이 풀지 못할 신비로운 현상이었다.

모순이면서도 현실인 플라세보 현상
좋은 이야기 덕에 공동체는 살 만해져
한류는 세계가 공감하는 우리 이야기

신비를 현실로 이해하려면 그것을 신비로 만든 조건이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플라세보가 신비인 이유는 우리의 상식이 있음과 없음, 물질과 마음을 전혀 소통할 수 없는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만약 이 전제가 무너지면 약이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정말로 효과를 발휘하는 현상은 전혀 모순이 아니다. 있음과 없음의 기준을 감각만이 아닌 생생한 삶의 경험에 둔다면 있으면서 없는 현상도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그런데 더욱 아이러니한 건 과학이 갈라놓았던 몸과 마음, 있음과 없음을 이어 줄 연결고리를 제공해 주고 있는 것 또한 과학이라는 사실이다.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여겨지던 ‘몸과 마음’, ‘있음과 없음’은 몸이기도 하고 마음이기도 한 신경세포들의 무한한 연결망을 공통기반으로 한다. 신경세포들과 그 연결망은 몸이고 있음이며 그것들로부터 떠오르는 것은 마음이고 없음이다. 그리고 신경세포 연결망의 패턴이 변하면서 만들어 내는 삶의 무늬가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신경세포 연결망에 되먹여 지면 연결 패턴이 변하고 그 변화의 흐름은 다시 새로운 이야기가 되어 흘러간다.

이야기는 삶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다. 우리의 뇌는 기억의 빈 공간이 클 경우 새로운 기억을 창조하면서까지 이야기의 흐름을 만들어 낸다. 의학은 작화증(作話症)을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질병으로 정의하지만, 우리의 뇌는 기억의 빈 공간을 능수능란하게 이어 붙이는 선천적 이야기꾼이다. 플라세보는 약과 의사에 대한 신뢰의 경험과 기억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긍정적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몸의 현상이다. 그러니 플라세보의 치유 효과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따지는 논쟁은 부질없다. 환자의 경험과 기억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신뢰의 경험과 기억을 확보하는 일이 더 시급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좋은 이야기는 건강한 몸과 마음을 만드는 밥이며 약이다!

좋은 이야기는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살 만한 곳으로 만들기도 한다. 정치는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구성원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겨루는 경연이다. 대의민주주의는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써 나갈 것인지에 대한 이견들을 드러내고 국민의 판단을 받는 과정이다. 역사는 단순한 사실들의 나열이 아니라 기록되고 기억된 사실들을 이어 붙여 의미를 찾아내는 스토리텔링이다. 역사 이야기는 그냥 재미로 즐기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이야기의 진행 방향을 정하는 그래서 그 큰 이야기의 흐름 속에 있는 우리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는 미래지향적 사건이다. 중국이 벌이고 있는 역사공정은 자신들의 미래에 유리하도록 과거의 이야기를 만드는 국가사업이다. 조선을 점령한 일본이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역사 왜곡에 힘을 쏟았던 것도 조선 민중이 미래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의 이야기가 세계인을 사로잡는 한류의 시대다. 우리의 기억과 경험과 미래 지향이 담긴 노래와 영화와 춤에 세계인이 열광한다. 우리의 몸속에는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자연과 인문을 아우르는 그래서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삶의 이야기가 흐르고 있기 때문 아닐까. 우리가 수 천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유교와 불교와 도교가 합쳐진 가뭇하고 묘한 풍류(風流)의 도, 즉 현묘지도(玄妙之道) 위에 민중의 피와 땀으로 써 내려간 한과 흥의 이야기를 물려받은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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