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예술가 154명 ‘그때 그 순간’의 기록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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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운구 작가 사진전 ‘사람의 그때’
고은사진미술관 12월 26일까지
시대의 초상 담은 163장 ‘타임캡슐’

화가 장욱진(충북 수안보,1983).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화가 장욱진(충북 수안보,1983).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163장의 사진에 기록된 한국 문화계의 역사.

강운구 사진전 ‘사람의 그때’는 문인과 화가 154명을 촬영한 사진 163점을 소개한다. 강 작가는 “전시장 양쪽으로 문인의 사진과 시각예술가의 사진이 각각 펼쳐진다”며 “문인은 산맥, 시각예술가는 강물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사진들은 강 작가가 50년 세월에 걸쳐 카메라에 담아낸 결과물이다. 전시는 12월 26일까지 해운대구 우동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열린다.


문화예술계 인사 50년간 기록한 사진

시각예술가는 강물, 문인은 산맥 역할

전시장 끝에 두 흐름이 섞이도록 연출

강운구의 ‘인물사진론’ 엿보는 재미도

소설가 최일남(서울 종로, 1975).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소설가 최일남(서울 종로, 1975).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사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인물사진이죠. 사진을 발명한 이유도 인물사진을 찍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50년간 채워 넣은 타임캡슐을 지금 연 것입니다.” 강 작가는 자신이 살아있을 때 이렇게 전시를 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내가 죽고 난 뒤에 사진이 낱장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작가가 꿰어야지 흐름도 있고, 스토리도 있는 거지. 또 작가가 직접 작업을 해야 원하는 톤으로 결과를 낼 수 있고요.”

출판인 한창기(충북 충주, 1996).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출판인 한창기(충북 충주, 1996).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화가 김기창(충북 청주, 1984).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화가 김기창(충북 청주, 1984).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강 작가는 사진에 찍힌 문화예술인 중 70여 명 정도는 이미 고인이 되었다고 했다. “나와 비슷한 또래가 많아요. 전시 소식을 듣고 반기는 이들이 많은데 아파서 전시장에는 못 오겠다고 하더라고요.” 강 작가는 1977년에 찍은 황석영 사진을 소개하며 “사람들이 ‘이게 황석영이란 말이야’ 하고 놀라는 것, 그게 바로 역사”라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각 인물의 사진 중 가장 오래된 사진으로 전시를 한다. “수십 번을 찍은 사람도 있고, 한 번만 찍은 사람도 있어요. 수십 번 찍은 사람도 맨 처음 찍은 사진을 선택했죠.”

또 강 작가는 필름에서 옛날에 자신이 고른 사진을 그대로 사용했다고 전했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당시에 선택한 것 옆의 사진이 더 좋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갈등을 했지만 예전 감각, 사진 속 인물에 대한 느낌이 가장 생생했던 그때의 감각을 믿기로 했죠.” 관람객은 전시에서 젊은 시절의 강운구가 선택한 사진을 보게 된다.

소설가 황석영(서울 영등포 1977).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소설가 황석영(서울 영등포 1977).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사람의 얼굴뿐 아니라 사진의 배경에서도 시대가 드러난다. 소설가 서정인이 1990년 키보드를 치는 있는 사진. 한 문학평론가는 ‘서정인의 문장 스타일이 달라졌다고 생각한 이유를 강운구의 사진을 보고 알게 됐다’고 말하기도 했단다. 강 작가는 “이게 바로 사진의 기록성이다”고 밝혔다.

박완서, 신경림, 백낙청, 김병익, 최일남, 한수산, 조세희, 서정주, 곽광수, 임응식, 승효상, 김수근, 함석헌, 남관, 허백련, 장욱진, 정상화, 한묵, 박고석, 천경자, 박노수, 유영국 등 쟁쟁한 인사들의 사진에서 그들이 문학과 예술에 열정을 불태운 한때를 느낄 수 있다. 강 작가는 카메라를 들고 그들과 그 순간을 함께했다.

화가 김구림과 정강자(서울 사직공원, 퍼포먼스 1970).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화가 김구림과 정강자(서울 사직공원, 퍼포먼스 1970).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1970년 김구림과 정강자가 서울 사직공원에서 문화인 장례식 퍼포먼스를 하다 파출소 앞에서 붙잡혔죠. 그때 경찰이 상부에 전화를 하며 ‘글쎄 모르겠습니다. 퍼포먼스가 뭔가라고 하는데’라고 말하는 걸 들었죠. 지금 생각하면 재미난 이야기죠.”

이번 전시에서 강 작가는 두 장의 사진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사진가 황규태·김기찬·한정식 세 사람이 인사동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진에서는 유리창에 강 작가의 모습이 비친다. 또 하나는 이영학 조각가가 만들고 있는 강 작가 본인의 두상을 통해서다. “내가 모델을 서면서 찍은 사진이죠. 나중에 완성된 조각이랑 내가 찍은 사진을 맞바꿨죠.”

조각가 이영학(서울 수유리 1998).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조각가 이영학(서울 수유리 1998).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사진가는 피사체 자신은 모르는 자기의 얼굴을 찍어내는 존재다. “찍히는 사람이 원래 모습대로 행동해야 진짜 얼굴이 나오거든요. 연기하는 것 같은 행동을 하는 경우도 그게 그 사람 성격이니까 그냥 말없이 따라가며 사진을 찍었어요.”

“장욱진처럼 상대가 뭘 하든 ‘나는 내 할 일을 한다’는 사람은 사진을 찍기 좋아요. 소설가 박태순은 덩치는 큰데 섬세한 사람이라 셔터 소리만 나면 ‘이젠 됐죠’ 이러는 거예요. 이제 다 찍었다고 했더니 긴장을 풀며 담뱃불을 붙이더군요.” 강 작가는 이 모습을 몰래 찍은 사진(1977년)을 이번 전시에서 소개한다.

강 작가의 사진 하나하나마다 이야기가 넘친다. 소설가 박경리가 자택에 창문을 내는 공사 현장에서 찍은 사진은 토지1 출판 당시의 사진이다.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라 글 쓰다 막히면 뭔가를 떼려 부수고 가구를 옮기고 그러거든요.”

신구문화사 앞에 신경림, 방영웅, 염무웅, 백낙청, 이호철이 함께 서 있는 사진(1973년)은 눈 오는 날 연탄배달부가 수레를 끄는 사진 시리즈를 찍고 돌아오는 길에 찍었다. “뭔가 제대로 찍은 것 같아 기분 좋게 걸어가는데 신구문화사에서 이 사람들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눈이 오니까 기념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촬영을 했죠.”

소설가 박경리(서울 정릉, 1976).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소설가 박경리(서울 정릉, 1976).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강 작가는 화가의 강물과 문인의 산맥을 전시장 가운데서 만나게 했다. 강과 산이 만나는 곳에는 한창기 같은 출판인의 사진이 섞여 있다. 작고한 한창기의 사진 세 장에는 강 작가의 특별한 애정이 담겼다. 1990년 찍은 인물 사진은 1997년 장례식 사진 속 영정 사진이 됐다.

사진작가는 누군가의 첫 번째 순간과 마지막 순간을 담아내는 기록자이다. “이번 전시 사진집이 나왔는데 시작은 박경리 선생으로 했고, 마지막은 북한산에서 이름 모를 화가가 풍경화를 그리는 뒷모습 사진으로 정했어요.” 팔순을 앞둔 사진작가가 열어 보인 타임캡슐에서 세상 모든 예술가의 한때를 생각하게 된다. ▶강운구 ‘사람의 그때’=12월 26일까지 고은사진미술관.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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