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말 광] 931. 죽기를 빌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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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원 교열부장

교열기자로서 단언하자면, 우리가 말글을 잘못 쓰는 사례 가운데 3할쯤은 한자 때문이다. 한자에는 숨은 뜻이 많고, 쓰는 상황에 따라 세세하게 구별해야 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허방을 짚을 수 있는 것. 2020년 황교안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가 ‘키우던 반려동물이 작고하셨다’고 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국립국어원이 펴낸 <표준국어대사전>(표준사전)을 보자.

*작고(作故): 고인이 되었다는 뜻으로, 사람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

이러니, 그냥 ‘반려동물이 죽었다’고 하면 됐을 것인데 한자말을 쓰다가 구설에 오르고 만 것이었다. 어느 공사 현장을 지나다가 ‘촉수 엄금’이라는 경고문을 봤다. 이런 말을 한자 세대가 아니면 쉽게 알아볼까, 싶었다. ‘손대지 마시오’면 충분했을 텐데…. 하여튼, 쉬운 말을 쓰든지, 아니면 정확한 뜻을 알고 한자말을 쓰자는 얘기다. 그래야만 멀쩡히 살아 있는 분에게 훈장을 ‘추서’하거나, 수험생이 원서를 ‘접수’하거나, 키우는 소가 송아지를 ‘출산’했다고 쓰는 잘못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난주 이 난에서 노태우 씨 장례와 ‘주기’에 관한 얘기를 했는데, 곧이어 한 독자분이, 신문들이 ‘영면’이라는 말을 엉터리로 쓰고 있다고 전화를 하셨다. 찾아보니 실제로 그랬다. 이런 식으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은 26일 향년 89세의 일기로 별세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영면을 한마음으로 기원했다.’

언론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아래처럼 잘못 쓰고들 있었다.

‘국민의힘은 26일 “노태우 전 대통령의 영면을 기원하며 아울러 유가족분들게도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고 했다./오(세훈 서울)시장은 헌화와 묵념을 한 후, 방명록에 ‘평안히 영면하소서’라고 적었다./이날 오전 빈소를 찾은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은 취재진에 “영면하시길 바란다. 감사하다”고 밝혔다.’

이 ‘영면’들이 왜 잘못일까. 표준사전을 보자.

*영면(永眠): 영원히 잠든다는 뜻으로, 사람의 죽음을 이르는 말.(오랜 병환 끝에 영면에 임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평온해 보였다.)

즉, 불면은 잠을 자지 못한다, 숙면은 깊이 잠든다, 영면은 영원히 잠든다는 말. 그러니 ‘영면했다’에는 ‘죽었다’는 뜻 외에 다른 뜻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해서, 거칠게 풀어 보자면 ‘영면을 기원했다’는 ‘죽기를 기원했다’, ‘영면하시길 바란다’는 ‘죽기를 바란다’가 된다. ‘명복을 빈다’거나 ‘편히 잠드시라’면 됐을 텐데, 한자말 뜻을 정확히 몰라서 저런 무서운 이야기를 하게 된 셈인 것. 자기도 모르게…. jinwo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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