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미혜의 젠더렌즈] 죽어야 사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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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법인 새길공동체 이사장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범주가 넓어지는 인권 확대의 역사이다. 지배층의 소유와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투쟁하지 않으면 피지배층의 생명권, 자유권, 안전권은 결코 누릴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일까. 여성의 인권, 나아가 모든 소수자의 인권은 아직까지도 죽은 자에 의해 조금씩 확대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미 고인이 된 세 분을 그 예로 들어 보겠다.

먼저, 변희수 하사다.

고(故) 변희수 하사는 성전환 수술을 하고 계속 여군으로 복무하기를 희망했지만 군은 심신장애 3급 판정을 내린 뒤 전역 처분을 내렸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 조치가 ‘법적 근거 없는 인권 침해’라고 판정했지만 별다른 대책 없이 재판이 늦어지자 변 하사는 전역처분취소 소송을 제기한 상태에서 지난 3월 생을 마감했다.

투쟁하지 않으면 누릴 수 없는 인권
여성 비롯한 소수자에게는 더 가혹
인권 역사 주체들 결코 잊지 말아야

마침내 10월 7일 대전지법은 변 하사가 생전 육군참모총장을 상대로 제기한 전역처분취소 청구 소송에서 변 하사의 손을 들어 줬고, 한 전문가도 이 소송 결과가 법적으로 ‘다툴 여지도 없는 명확한 판결’이라고 언급했다. 이에 군인권센터와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등 인권단체 활동가들은 국방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군에 항소 포기를 촉구한 바 있지만, 그런데도 군 당국은 상급 법원의 판단을 받아 볼 필요가 있다며 법무부에 항소를 요청한다고 밝혔다.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하지만 결국 변 하사는 세상을 떠난 뒤에야 ‘대한민국 군인’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성별 정체성을 떠나 이 나라를 지키는 훌륭한 군인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 주고 싶다”던 변 하사의 마지막 호소가 다시 아프게 다가온다.

두 번째로는 성추행 피해 공군 부사관 이 모 중사다.

이 중사는 상관인 장 모 중사의 성추행 및 2차 가해에 시달리다가 지난 5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군은 사건 초기부터 성범죄를 입증할 블랙박스 등 증거물을 확보하고도 석 달간 가해자를 불구속 상태에서 조사한 것으로 밝혀져 많은 이들의 원성을 샀다. 국민청원이 이루어지고 언론을 통해 문제가 불거지자 할 수 없이 군은 국방부로 사건을 이관해 대대적인 수사를 진행한 것이다.

지난 10월 국방부 검찰단은 국방부 보통군사법원에서 열린 결심공판에서 군인등강제추행치상,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보복협박 혐의로 구속기소 된 장 중사에 대해 징역 15년을 구형했다. 다만 장 중사 측은 피고인 신문에서 강제추행 혐의는 인정하면서도 보복협박 혐의는 부인했다고 하는데 문책 대상은 형사 미 입건자 중 징계 또는 경고 처분 대상자를 포함해 총 38명에 이른다고 한다.

심한 성추행을 당했는데도 이를 묵과하거나 가해자에 동조한 사람이 수십 명에 이르는 상황 속에서 신혼생활을 앞둔 이 중사가 죽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세 번째로는 ‘마포구 데이트 폭력 피해’ 여성이다.

지난 7월 데이트 폭력 사건 피해 여성은 마포구 한 오피스텔에서 가해자와 언쟁을 벌이다 심각한 폭행을 당하고 3주 동안 의식불명 상태로 있다가 끝내 숨졌다. 데이트 폭력은 연인 사이에서 발생하는 폭력으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친밀한 관계라는 특성상 피해자가 신고하기도 힘들고 폭력 수위가 심해져도 이를 범죄로 인식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위험할 수 있다.

데이트 폭력 신고는 지난 5년간 평균 9500건이 넘을 만큼 많이 발생하고 있으며 성폭력이나 살인미수 및 살인 등 다른 중범죄로 이어지고 있어서 여성의 안전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또한 데이트 폭력을 연인들 사이의 사랑싸움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서 제삼자가 데이트 폭력을 경찰에 신고하더라도 실제 수사가 제대로 진행되지도 않고 가해자를 처벌하지 않아서 더 심각한 폭력을 방지하지 못하고 만다.

지난달 가해자는 상해치사 혐의로 구속기소 되었지만 유족 측은 검찰의 처분에 유감을 나타내며 데이트 폭력에 대한 관심과 후속 논의가 이루어져 충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기를 눈물로 호소하고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이고 싶다.’

김춘수의 시 ‘꽃’의 한 부분을 인용했다. ‘그 무엇’이 되고 싶어 투쟁하다 앞서간 꽃들은 우리들이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인권 역사의 주체이다. 이름 없는 그 이름을 다시 불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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