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최후의 날 장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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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모든 생명체나 행성 자체를 파괴할 수 있는 ‘최후의 날 장치’는 미국과 구소련 냉전체제가 심화하면서 가설처럼 나오기 시작했다. 1945년 원자폭탄 일본 투하와 1950년대 미·소 핵 군비 경쟁 과정에서 군사 전문가들은 코발트로 둘러싼 핵폭탄을 폭발시켜 엄청난 양의 방사능을 방출해 지구를 생명체가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든다는 ‘최후의 날’ 가정까지 세웠다. 실제로 핵 공격이 임박했다는 신호가 갈 경우 비축 중인 핵폭탄을 모두 폭발시키는 ‘최후의 날 장치’로 핵전쟁을 저지한다는 이론도 제시됐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두려움으로 증폭되면서 ‘최후의 날 장치’는 영화나 소설, TV 드라마의 단골 주제로 자리 잡았다. 공상과학 코미디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1964)에서는 미국 극우파 장군의 지시로 모스크바에 핵폭탄이 떨어지고, 소련의 ‘최후의 날 장치’가 가동되면서 끝을 맺는다. 스타트렉 에피소드 시즌 2(1967)에서는 ‘최후 심판의 무기’가 인기를 끌었다. 인류 전멸을 막는 주인공으로 제임스 본드가 수시로 등장한다. ‘007 시리즈’ 클라이맥스는 인류를 몰살시킬 수 있는 핵폭탄을 제임스 본드가 폭발 몇 초 전 해체하는 위기일발 장면이 나온다. 어느 색깔 전선을 잘라야 할지 전전긍긍하는 제임스 본드처럼 인류도 지구 온난화라는 시한폭탄을 아슬아슬하게 안고 있다.

1세대 제임스 본드인 숀 코너리의 고향인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지난 1일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 특별정상회의가 열렸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개막식에서 “우리는 오늘날 제임스 본드와 거의 같은 위치에 있다. 비극은 영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최후의 심판 장치는 진짜이며, 기후 재앙을 막기 위한 시간은 자정 1분 전”이라고 연설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도 “지금은 정치를 뛰어넘어 행동해야 할 때”라면서 “미래 세대의 요구에 응답한 지도자들로 역사에 남아 달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하지만 실망감은 커지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탄소 중립 목표를 2060년, 인도는 2070년으로 늦추어 잡고, 선진국들도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지구촌 대응은 삐걱거리고 있다. 탄소 중립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인류의 생존이 걸린 문제다. “이것은 훈련이 아니다. 지구에는 코드 레드(code red)”라는 툰 베리 등 청년환경운동가들의 지적이 한결 엄중하게 들린다. ‘지구 최후의 날’을 막기 위한 모두의 행동이 절실하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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