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의 지발도네(Zibaldone)] 드라마와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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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본 미국의 지인은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를 영위하는 한국에서 이런 자본주의 비판 드라마가 제작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고 전했다. 나에게 취재를 요청한 미국 방송의 기자는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게임이 얼마나 실제의 한국과 닮아 있는지 물었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말해 온 것이 지난 한국 대중문화의 모범 답안이었다. 적어도 한국에서 드라마는 현실보다 못하다는 믿음이 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너무 극적이라, 드라마의 허구가 따라오지 못한다는 우스개가 곧 진실이었다.


‘오징어 게임’은 자본주의 비판이 아니라
시스템의 작동을 막는 반칙에 대한 문제 제기
어쩌면 자본주의 본질 은폐하는 것일 수도

그러나 ‘오징어 게임’을 본 타국의 시선은 한국과 드라마를 동일하게 취급하는 느낌이다. 더 이상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퉁 치면서 넘어가기 곤란한 분위기이다. 이 드라마가 호소력을 발휘한 이유는 넷플릭스라는 글로벌 OTT 서비스 플랫폼 덕분이라는 진단도 있지만, 현란한 미장센과 부채 문제를 다룬 주제 때문이라는 것이 해외에서 빈번하게 접할 수 있는 평가이다. 물론 드라마 전개에 스며 있는 인종주의나 소수자 혐오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무엇보다 이 드라마를 자본주의 비판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압도적이다.

앞서 언급한 지인의 전언처럼, 한국과 자본주의 비판 드라마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실제로 ‘오징어 게임’의 성공을 경제 패러다임에 근거해서 찬양하는 보도와 분석이 차고 넘치는 것이 우리의 현실 아닌가. 어떤 칼럼은 한류의 발전을 위해 넷플릭스와 국내 제작사가 맺은 불평등 계약을 인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쓰기도 했다. ‘오징어 게임’이 가성비 높은 제작으로 넷플릭스의 배를 불려 줘도 국내 제작사는 고사하고, 직접 드라마를 현장에서 만드는 제작진의 처우는 개선되지 않는다. 문화 산업이 숙련노동의 일종이지만, 표준 계약서 하나 제대로 쓰지 않는 작업장이 허다하다는 불편한 진실은 이런 이데올로기적인 선전선동에 낄 틈이 없다.

사정이 이런 데도 드라마는 자본주의 불공정성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나는 지금 “보인다”고 썼다. 많은 해외 시청자들의 수용과 별개로, 이 드라마가 과연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이 드라마의 한 장면은 프랑스 정신분석 이론가 자크 라캉의 <욕망 이론>이라는 국내 번역 선집을 소품으로 보여 준다. 이런 암시가 등장한다고 이 드라마가 정신분석 이론에 맞춰 만들어졌다고 말하긴 어렵다. 말 그대로 <욕망 이론>은 소품일 뿐이다. 소품 이상의 의미라면, 모든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란 라캉의 명제를 조금 더 고민해야 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드라마는 벤담의 ‘판옵티콘’을 보여 주는 쪽에 가깝다. 말하자면, 다분히 공리주의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 드라마를 굳이 비판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그 자본주의를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만드는 반칙에 대한 비판으로 봐야 한다. 프론트맨은 이 판옵티콘의 규칙을 수호하는 간수의 역할을 자임한다. 판옵티콘은 공정한 규칙의 적용을 전제한다. 이 공정성이 무너지면 판옵티콘의 감시 기능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교화도 불가능해진다. ‘오징어 게임’은 이 공정성을 교란하는 범죄자들을 단죄하는 권선징악의 드라마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기훈의 변심 또는 결심을 이런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기훈의 분노는 시즌 2를 위한 알리바이이자, 동시에 드라마의 주제 의식을 드러내는 장치이다.

물론 이런 기훈의 동기는 불분명하다. 이 모호한 결론은 판옵티콘의 기능을 정상화해서 교화의 역할을 복원해야 한다는 입장일까, 아니면 판옵티콘 자체를 파괴해야 한다는 입장일까. 드라마의 형식 논리를 참고한다면, 전자에 가깝다. 누군가 나타나서 노숙자를 돕는다는 설정이 이를 증명한다. 노숙자를 만들어 내는 체제에 대한 분노라기보다, 그 노숙자를 돕는 의인이 있음에도 인간을 믿지 않는 설계자에 대한 분노이다. 다소 나이브한 휴머니즘이 이 드라마의 주제를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징어 게임’은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의 작동을 은폐하는 베일에 가깝다.

그렇다고 시청자들이 드라마를 오해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실상 이런 드라마의 내적 논리는 시청자의 수용 과정에 중요하지 않다. 대중문화의 작용은 상호 수동성에 있기 때문이다. 코미디 프로그램을 시청할 때, 이미 녹음해서 재생하는 웃음소리를 따라 덩달아 웃게 되는 것처럼, ‘오징어 게임’이 보여 주는 현실 비판에 우리는 직접 나서서 문제 제기할 필요가 없다는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다. ‘오징어 게임’의 기능 못지않게 지금 한국에서 이런 역할을 가장 잘 수행하고 있는 현실의 장치는 다른 무엇도 아닌 대통령 선거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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