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수의 지금 여기] 폭력에 대한 감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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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오징어 게임’의 열풍이 식을 기미가 없다. 글로벌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콘텐츠 순위 집계 사이트에 따르면, 이 드라마는 9월 23일부터 11월 7일까지 46일간 전 세계 넷플릭스 시청 순위 1위에 올랐다. 순위가 집계되는 83개국의 결과를 합친 것이니 대단한 기록이다. 도대체 이 열기가 언제까지 갈 것이냐가 최대 관심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덩달아 마음도 무거워진다.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는 별도로, 드라마가 표현하는 방식의 선정성 때문이다. 지금 세계를 휩쓰는 것은 드라마의 인기만이 아니다. 폭력성의 전염에 대한 우려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얼마 전 노르웨이의 한 소도시에서 한 남성이 번화가를 돌아다니며 사냥하듯 화살을 난사해 5명이 숨지고 2명이 다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남자는 “갑자기 ‘오징어 게임’에서 듣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전 세계 ‘오징어 게임’ 열풍과 함께
폭력성에 대한 경고도 잇달아

한국 드라마·영화 날로 잔혹
지나친 폭력성 진지하게 성찰을

폭력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감각도
한층 민감해지고 섬세해져야



폭력적 상황에 자주 노출되면 인간의 뇌는 거기에 적응하기 마련이다. 특히 아이들일수록 ‘따라 하기’를 통해 폭력성과 공격성을 거부감 없이 내면화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초등학생들이 게임에서 탈락한 친구들을 때리거나 총을 쏘는 시늉을 하는 충격적인 모습들이 여러 차례 목격되고 있다. 각국의 교육 당국이 학생들의 ‘오징어 게임’ 시청 제한에 잇따라 나서는 등 폭력성에 대한 경고 조치가 유럽과 미국 호주 동남아 남미로 퍼지는 양상이다.

우리 놀이문화의 핵심이 잘못 전달된 탓이 크다. 놀이와 게임은 엄연히 다르다. 놀이는 ‘여럿이 모여 즐겁게 노는 일’이라고 국어사전에서 풀이하고 있다. 뚜렷한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재미있고 즐거우면 되는 것이다. 게임은 서양에서 들어온 개념이다. 이기는 게 목적이고 그 결과로서 돈(아이템)의 획득이나 지위(레벨) 상승이 뒤따른다. 요컨대, 놀이는 과정, 게임은 결과에 방점이 찍힌다.

가령,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보자. 원래는 술래에게 잡힌 사람을 다시 살려 주는 재미가 있는 놀이다. 술래한테 잡힌 아이들은 새끼손가락을 걸고 긴 띠를 만들어 누군가를 기다린다. 술래가 뒤돌아 구호를 외치는 사이 잡히지 않은 사람이 그 새끼손가락을 떼어놓으면 다시 살아날 기회가 주어진다. 재미와 즐거움을 주는 ‘놀이’다. 움직임이 발각되자 아예 죽여 버리는 드라마에서의 ‘게임’과는 다르다.

‘오징어 게임’에서 가장 힘겨웠던 폭력 장면은 무차별 총살이다. 아무런 무장도 돼 있지 않은 민간인들이 손도 쓰지 못한 채 일방적인 죽임을 당한다. 저 장면은 명백한 데자뷔요 트라우마다.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아픔인 집단 학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홀로코스트를 자행한 나치의 만행, 해방공간의 제주 4·3 사건을 비롯한 무수한 양민 학살, 가깝게는 1980년 광주 시민의 무고한 죽음과 심지어 형제복지원의 인권 말살이라는 공권력의 폭력까지 오버랩된다. 여전히 폭력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이 땅에 존재한다. 아픔을 치유받지 못한 채 숨죽여 살아가는 유족들에게 폭력은 그 묘사만으로도 견디기 힘든 고통일 것이다.

한국 드라마와 영화가 노출하는 폭력의 강도가 날로 거세지고 있다는 우려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장면은 예삿일이고 그 표현 또한 극도의 잔인함으로 치닫고 있다. 물론 영화적 장치로만 읽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 폭력적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선 폭력적 현실을 그대로 재현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하지만 영상 예술의 설득력이 이런 자극적인 방식밖에 없는 거라면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대중매체의 폭력에 둔감해지는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전면적으로 떨어뜨린다. 미디어의 폭력성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야 하는 이유다.

‘폭력’이란 말의 외연을 넓힐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어디선가 접한 적 있다.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문학평론가 신형철) 더 섬세해질 수 있는데 그러지 않기를 택하는 순간, 타인에 대한 잠재적·현실적 폭력이 시작된다는 생각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단순히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 문제가 아니다. 폭력이 난무하는 현실을 모른 체하는 것도,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무뎌지는 것도 폭력에 가담하는 것이다.

카뮈의 <페스트>에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페스트균에 감염되고 또 전염시킨다. 페스트는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무딘 이성과 맹목적 관습의 상징이다. 폭력 역시 그런 것이다. 마치 페스트가 병자들에게 스며들듯이 살인이 미화되고 폭력은 정당화된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폭력에 대한 감수성, 지나치다 할 정도로 더 섬세해지고 민감해져야 한다.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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