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많은 늦가을 봉하 들녘에 다녀왔다

최혜규 기자 iwil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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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화포천 습지·봉하마을

경남 김해 화포천습지생태공원 탐방로의 물억새 물결과 저녁 노을. 경남 김해 화포천습지생태공원 탐방로의 물억새 물결과 저녁 노을.

공기의 온도는 낮아지고 밀도는 높아지는 계절이 오면 제때 들여다보지 못한 생각들도 가라앉아 부대낀다. 이럴 때 걷기는 최고의 처방이다. 걷다 보면 어떤 마음은 갈피가 잡히고 어떤 마음은 흘러간다. 경남 김해의 화포천습지생태공원에서 출발해 이어지는 봉하마을을 둘러보고 다시 습지로 돌아와 탐방로를 걸었다. 화포천의 생태와 봉화산의 사색, 봉하마을 산책을 더한 늦가을 걷기 여행.


140m 봉화산, 낮아도 탁 트인 높은 산

봉하마을선 작은 비석·낮은 집의 울림

화포천은 물억새 물들이는 노을이 압권

생태·사색·산책이 있는 느린 걷기여행


봉화산 호미든 관음상에서 바라본 봉하들녘. 봉화산 호미든 관음상에서 바라본 봉하들녘.

■낮지만 높은 산의 숲길

화포천은 김해시 진례면 대암산에서 발원해 13개 지천과 합류해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하천이다. 낙동강 범람으로 만들어진 이 곳 습지에 화포천습지생태공원과 함께 화포천습지생태박물관이 조성된 건 2012년이다. 박물관에서 내려다보이는 습지생태공원은 굽이치는 화포천을 따라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길게 이어진다. 강 건너편으로는 진영역-한림정역 구간의 경전선 철도가 강과 나란히 지난다. 습지생태공원 탐방로는 경관과 생태 특징을 고려한 5개 구역과 2개 목교를 기준으로 4개 코스로 나뉜다. 습지의 가을을 만나기 전에 공원에서 서쪽으로 1.5km 정도 더 떨어진 봉하마을에 먼저 다녀오기로 한다.

박물관 앞 서쪽 목교를 건넌 뒤 어울림마당을 지나서 본산배수장을 끼고 돌아 올라가면 직선으로 뻗은 제방길이다. 최단 거리로 곧장 가는 대신 도중에 봉화산 숲길로 올라간다. 산길을 걷다 보면 오래지않아 나무 계단길 위로 우뚝 선 호미든 관음상이 나타나고, 곧이어 정상 사자바위에 오를 수 있다. 호미든 관음상은 1959년 불교학도들이 농촌 발전을 기원하며 봉안한 불상으로, 화재로 탄 것을 1998년 다시 세웠다. 봉수대가 있는 사자바위에 오르면 해발 140m에 불과한데도 사방으로 탁 트인 시야에 머릿속에도 공기가 통하는 기분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낮지만 높은 산’이라 불렀다는 이유다.

사자바위에서 정토원으로 내려와서 울타리를 쳐둔 부엉이바위를 멀찍이서 본 뒤 봉하마을 방면 이정표를 따라서 발걸음을 돌린다. 거대한 암벽들 사이에서 바위틈에 누워있는 마애불(마애여래좌상) 조각을 발견했다면 봉하마을에 거의 다 온 것이다. 봉화산에서 멀리 낙동강과 기차를 보면서 더 넓은 세계를 꿈꾸던 소년 노무현이 나고 자란 마을. 산 아래 펼쳐진 마을 어귀는 봉화산이 포근하게 감싸안은 모양새라서 첫인상이 환하다. 큰 인물이 나는 기운이 있다는 풍수지리설도 일견 납득이 간다. 마을로 들어서면 부엉이바위 아래 봉화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모은 거울못과 작은 저수지 앞 잔디동산을 거니는 사람들이 보인다.


봉하마을 어귀의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 봉하마을 어귀의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

■부끄럼 타는 집과 작은 비석

노무현 대통령의 묘역은 잔디동산 옆, 바로 산 아래다. 사자바위와 부엉이바위를 뒤로 하고 봉하들녘과 화포천을 앞에 둔 기다란 삼각형 모양 묘역 안쪽에 봉분을 대신한 ‘작은 비석’ 너럭바위가 있다. 가깝게는 정의당 심상정,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처럼 여야를 막론한 정치인들이 기로마다 참배하는 곳이 됐지만, 매년 평균 70만 명 이상 찾아와 방명록을 채우는 이들은 모두 평범한 시민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호감도에서 박정희 대통령 다음이 된 지 오래고,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는 ‘박정희 대 노무현’의 가상대결에서 47.3% 대 45.8%의 박빙을 기록했다. 봉하마을이 관광지가 된 사연이겠다.

대통령 묘역과 퇴임 후 서거 전까지 생활한 ‘노무현대통령의집’, 태어나 8살 때까지 산 생가는 나란히 모여있다. 대통령의집은 묘역과 마찬가지로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주위 환경에 어우러져있다. 뒷산을 가리지 않도록 낮고 평평한 지붕을 올린 단층집은 위용을 자랑하기는커녕 숨어있다는 표현이 오히려 어울린다. 대통령과 고 정기용 건축가는 설계 당시부터 ‘지붕 낮은 집’이라고 불렀고, 대통령은 ‘부끄럼 타는 집’이라고도 했다 한다.

감나무가 반기는 집 내부는 소박하고 단정한 한옥 구조다. 건축가는 흙, 나무 등 자연재료와 중정을 중심에 둔 ‘ㅁ’ 자 채나눔, 차경(창에 비치는 풍경)이나 뒤뜰 정원의 화계(경사지 꽃 계단) 같은 요소에 생태건축의 철학을 담았다. 공간 구성과 비를 피하는 복도 지붕 등에는 단순한 사저가 아니라 마을 공동체의 베이스캠프와 시민 개방 공간을 구상한 건축주의 뜻이 담겼다. 집은 거실 컴퓨터의 유서 파일을 포함해 생전 그대로 보존돼있다.

대통령의 집은 지정 시간에만 개방되기 때문에 사전 또는 현장에서 관람을 예약하고 생가 등을 둘러보는 게 좋다. 대통령의집과 생가 맞은편의 옛 추모의 집 건물은 내년 5월 시민문화체험관으로 개관할 예정이다. 전시실과 영상관, 강의실, 도서관 등을 갖춘다. 생태연못과 수생식물원 등이 있는 생태문화공원 ‘사람사는들녘’에서는 화포천 습지로 되돌아가는 제방길이 이어진다.


화포천습지생태공원의 겨울철새 집결 구역. 화포천습지생태공원의 겨울철새 집결 구역.

■너른 습지의 가을과 노을

돌아오는 제방길은 갈 때와 달리 차도와 완전히 분리된 도로다. 생전 대통령이 자전거로 달리던 길에 조성한 ‘대통령의길’의 일부다. 대통령의길은 화포천습지생태공원에서는 동쪽 목교 부근까지 습지 탐방로 위쪽으로 나란히 이어진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8년 퇴임 뒤 대통령의집이 완공되기 전부터 봉하마을 살리기를 위해 습지 정화활동에 힘을 쏟았다. 대통령의집 차고에는 대통령이 직접 타고 화포천 쓰레기를 주웠던 보트가 아직 있다. 수질 오염과 하천 쓰레기로 방치됐던 화포천 습지는 서서히 생태계를 회복하기 시작해 2014년 천연기념물 황새가 돌아왔다. 지금은 멸종위기종 24종을 포함해 800종 생물이 사는 생태관광지역이 됐다

화포천 습지는 화포천의 중·하류에 길이 8.4km, 면적은 3㎢가 넘는 규모로 펼쳐져있다. 우리나라에서 우포늪 다음 크고, 하천형 습지로는 국내 최대다. 화포천습지생태공원은 경관과 생물 보존이 필요한 길이 3.5km, 면적 1.5㎢ 구간에 조성됐는데, 공원의 4개 탐방로 코스 가운데 박물관 건너편 서쪽 목교 지점에서 동쪽 공원 경계를 한바퀴 크게 돌아 박물관으로 돌아오는 B코스와 C코스를 걷기로 한다. 가끔 지나는 기차를 보면서 습지의 가을 풍경을 손에 닿을듯 만나는 코스다.

탐방로는 나무 데크와 흙길이 번갈아 평탄하게 이어진다. 습지의 풍경색은 완연한 갈색이다. B코스의 노랑어리연꽃뜰은 늦봄에 피는 노랑어리연꽃의 이름을 딴 구역인데, 지금은 대체로 목초지가 이어지다가 이따금 이른 겨울 철새와 오리가 물결을 일으키는 물길을 먼 발치에서 목격할 수 있다. 습지 전체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식물은 은백색으로 흔들리는 물억새다. 창포뜰과 물억새뜰이 속한 C코스에 가면 너른 물길이 더 가까이에서 자주 나타나서 습지의 매력이 더 생생하다. 물억새의 물결도 더 넓어진다.

공원 끝을 돌아서 다시 박물관로 오는 길은 오른쪽에 습지가, 왼쪽에는 들녘이 펼쳐진 둑길이다. 습지의 노을은 새벽 물안개와 함께 화포천 습지의 비경 중 하나다. 봉화산 숲길을 포함해 화포천습지생태공원과 봉하마을을 모두 둘러보는 코스 길이는 도합 15km 남짓. 봉하마을이나 습지 탐방로 코스만 선택해서 걸어도 된다.

글·사진=최혜규 기자 iwill@busan.com


최혜규 기자 iwil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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