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인 듯 안이고, 안인 듯 밖인’ 호기심 불러일으키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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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공간읽기] 기장 임랑문화공원(박태준 추모 기념관)

철판이나 알루미늄 벽으로 둘러싸인 독특한 구조다. 언뜻 보면, 베일에 싸여 있는 것 같다. 간혹 주변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아직도 공사 중인가 봐”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ㅎㅎ. 하늘색 알루미늄 외장재가 건물을 감싸듯 둘러싸고 있으니, 그렇게 보일 수 있겠다 싶다. 사실 마을과 키 높이를 같이하고 있고, 나무 아래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어 유심히 보지 않으면 놓치기 십상이다. 임랑문화공원(박태준기념관·부산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은 이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자리를 지킨다. 그만큼 마을과 조화롭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둔덕 아래 집들이 있는 느낌이랄까.


철판·알루미늄으로 둘러싼 독특한 구조
물·바람·빛이 어우러진 수정원 ‘백미’
어둠과 밝음 ‘빛의 미학’ 담은 회랑 눈길
박 회장이 쌓은 담장·붉은 강철 소재 등
영원한 포스코맨 회상할 장치도 곳곳에


철강왕을 기억하다

부산 갈맷길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임랑문화공원은 대지면적 4067㎡에 지하 1층, 지상 1층, 연면적 952㎡ 규모로 아담한 공원이다. 잔디와 억새, 낮은 언덕이 어우러져 흡사 고급스러운 미술관처럼 보인다. 공간 설계는 (주)비씨에이치오건축사사무소 조병수 건축가가 했다. 그는 옛 고려제강 공장 건물을 리모델링한 복합문화공간 F1963을 설계한 건축가다. 조 건축가는 “한국경제에 큰 기여를 한 청암(靑巖) 박태준 전 포스코 명예회장의 뜻과 정신을 배우는 교육의 장이자 지역 주민과 관광객에게 휴식이 되어줄 수 있는 공원형 추모기념관으로, 2013년 현상공모를 통해 시작했다”고 말했다.

공원이 자리한 곳은 임랑 마을 제단자리. ‘철강왕’ 박 회장의 삶의 자취가 배어 있는 곳이다. 공원은 기부채납한 박 회장 땅과 마을 주민 땅 일부를 수용해 꾸며졌다. 기념관 입구 반대쪽엔 박 회장 생가도 자리 잡고 있다. 임랑문화공원이 박태준기념관과 박태준 생가, 옥외 주차장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임랑문화공원의 또 다른 이름 박태준기념관은 좁게는 전시관과 수정원, 도서관, 수장고, 세미나실 등으로 이루어진 실내 공간을 지칭한다.

기념관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전시관이 있고, 그 앞엔 중정 같은 수정원이 있다. 수정원 한쪽엔 박 회장이 생전에 좋아했던 나무, 개잎갈나무가 자태를 뽐낸다. 개잎갈나무 주변에는 작은 나무들이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어릴적 박 회장은 이 나무 밑에서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곤 했다. 그 맞은편엔 임랑 마을을 지키던 수령 200년가량의 할아버지 당산나무(해송 두 그루)도 당당하게 서 있어, 수정원을 한층 격조 높게 한다.

이곳엔 비단 박 회장의 흔적만 있는 건 아니다. 주민들이 살던 건물의 벽돌, 서까래 등 그 흔적도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당초 이곳엔 주민들의 집 대여섯 채가 있었다. 이중 세 채를 개·보수해 마을의 역사성을 이어가며 기념관과 교육실 등 커뮤니티를 위한 시설로 재활용했다.

조 건축가는 ‘누구를 위한 시설이 돼야 할까?’ 고민했다. 지역 주민들이 첫째였다. 공원 땅은 박 회장의 삶의 자취가 많이 배어있기에 그 기억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특히 박 회장이 진두지휘해 쌓았던 담장을 허물지 않고 그대로 보존한 것도, 땅이 가진 기억을 중요하게 생각한 이유였다. 조 건축가는 “박물관보다는 장소성·역사성을 더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땅이 가진 기억, 역사, 나무를 보존했다. 여기엔 기장군청의 적극적인 협조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박 회장에 대한 추모 공간이자, 지역 주민을 위한 커뮤니티 공간으로 공원이 조성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숨겨놓은 보석을 만나다

임랑문화공원은 안과 밖이 완전히 다르다. 여기서 밖은 단순한 밖이 아니다. 밖이면서 때론 안이 되기도 한다. 그게 건물을 감싸는 알루미늄 패널과 중정의 작용이다.

공원에 들어서면, 철이나 알루미늄을 활용해 만들어진 여러 구조체를 만난다. 그중에서도 병풍처럼, 혹은 쥘부채처럼, 건물을 감싸는 알루미늄 패널과 마주한다. 한데 이게 아주 묘하다. 공간을 두 겹으로 나누기 때문이다. 하나는 벽 바깥의 야외 공간, 또 다른 하나는 벽 안의 야외 공간이다. 벽 안의 야외 공간은 도서관 건물과 야외 벽 사이의 공간으로 실내 같기도 하고, 실외 같기도 한 이중적 공간이다. 중정도 알루미늄 패널을 기준으로 보면 안이지만, 천장이 뚫려있고 자연과 마주하니 꼭 안이라고 할 수도 없다.

소재가 주는 고정된 틀도 깬다. 철이나 알루미늄이라고 해서 구조물이 무조건 투박하거나 거칠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빛의 밝기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알루미늄 외장재는 ‘반짝이는 은빛 파랑’이라는 의미를 갖는 임랑 마을의 색상인 하늘색을 띠어 밝은 희망을 염원한다.

하늘색 알루미늄 패널 일부는 완전히 막혀있기도 하고, 일부는 듬성듬성 막혀 있어 지나가는 이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내부에서 보면 마치 버티컬 블라인드처럼 바깥 풍경을, 혹은 빛을 조율하는 듯 보인다.

알루미늄 패널이 건물을 감싸고 있어 밖에서는 다분히 폐쇄적으로 보이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 중정을 보면 보석을 만난 느낌이다. 꼭꼭 숨겨 놓았던 보석이 드러나는 반전이랄까.

기념관을 감싸는 알루미늄 패널은 그 모양이 병풍이나 쥘부채처럼 접이식으로 되어 있어 멋스럽다. 또 패널 사이에 이음부를 만들어 다양한 각도에서 조립할 수 있게 했다. 덕분에 부드러운 곡면 표현도 어렵지 않았다.

곳곳에서 녹슨 느낌의 붉은 강철판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강철판을 소재로 사용한 것은 포스코의 옛 기억을 더듬는 효과다. 공원 곳곳에 설치된 벤치와 기념관 앞 박 회장의 어록과 ‘청암’이란 글자가 짙게 새겨진 기념비 철판도 붉다. 이중 레이어(layer) 효과를 갖는 수장고 외장재도 시뻘건 철판이다. 조 건축가는 “벤치는 공원 내 모두 6개가 있는데, 포스코에서 공수한 스틸 후판(두꺼운 철판)을 재활용해 만들었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벤치가 역사성을 간직한 묵직한 울림처럼 다가온다. 외부의 콘크리트나 철판과 다르게 건물 내부는 의도적으로 목재와 따뜻한 느낌의 조명을 활용해 건물 안과 바깥의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빛을 디자인하다

조명은 빛을 만나 더 새로워졌다. 임랑문화공원의 백미는 수정원과 이를 둘러싼 회랑이다. 현재 수정원은 정식 개관을 앞두고 공사 중이라 그 멋을 온전히 보여주지 못해 조금 아쉽다.

공원 내 전시관은 중정을 끼고 긴 복도형 회랑이 감싸고 있는 형태다. 회랑은 사뭇 길다. 통로를 따라 이어진 은은한 조명이 공간을 더욱 아늑하게 만들어 준다. 하지만 어둠은 빛을 이기진 못한다. 회랑 안과 밖의 밝기 차이를 과도하게 만듦으로써 실내는 오히려 어두워 보이지만, 커튼을 살짝 들어 올린 듯한 벽면 밖의 눈부심은 더 강렬하다. 어둠과 밝음, 빛의 대비가 만들어 낸 오묘함. 눈길은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벌써 빛을 향한다. 회랑 중간중간 그 어떤 조명 기구보다 더 멋진 빛을 내는 자연의 빛 조명이 이곳에선 우리를 기다린다. 동그랗게 뚫린 틈 사이로 중정-수정원이 보인다. 해송과 개잎갈나무, 멋스러운 고목과 햇살에 눈길이 머문다.

수정원엔 자갈이 깔려 있다. 물론 물과 함께다. 물, 바람, 빛이 만난다. 수정원 윤슬이 회랑 벽에 반사돼 일렁거리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수정원에 물이 담겨 해송이 물에 비치면,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지요.” 기장군청 문화관광과 이수연 학예사의 말이다.

회랑이 끝날 무렵, 천창을 만난다. 창은 조명의 또 다른 이름임을 실감한다. 건축가의 손끝이 빛을 다듬었다. 빛이 알루미늄 패널 틈새를 통해, 수장고 철판을 통해 디자인됐다. 좋은 조명의 가치는 빛의 형태를 디자인한다고 했던가?

회랑을 따라 메인 전시실로 들어서면 박 회장의 얼굴 조각상과 평소 그가 사용하던 작업복, 지시봉, 구두 등 전시 유품들이 보인다. 전시관 중앙에 이르면 관람객이 벤치에서 앉아 멍 때리며 수정원과 박 회장 생가를 감상할 수 있다. 수정원에 달이 비치는 모습도 상상해본다. 공원의 풍경은 밤에도 아름답다.

최근 임랑문화공원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는 ‘2021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 우수상, ‘2021 부산건축상’ 장려상을 받았다. 올해는 박 회장의 서거 10주기가 되는 해다. 그가 돌아가신 그다음 날인 12월 14일, 임랑문화공원은 정식 개관할 예정이다. 어느 햇살 좋은 날. 이곳으로 발걸음 내디뎌 보는 건 어떨까? -끝-

정달식 선임기자 dosol@busan.com

공동 기획: 부산일보사·부산광역시건축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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