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전두환의 죽음, ‘애도’의 정치학
광주 북구 망월동 5·18 구묘역(민족민주열사묘역) 들머리 바닥에 박힌 '전두환 방문 기념 비석'의 모습. 오월 영령을 추모하는 재야인사들이 전두환 씨의 이름 세 글자를 사람들이 밟도록 해당 비석을 땅에 묻었다. 연합뉴스
한 계간잡지에서 읽은 글 중에 죽음을 언급한 대목이 있었다. 사람의 죽음에도 등급 혹은 서열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글쓴이의 지적처럼, 그것은 차별일 수도, 질서일 수도 있다. 살아생전에 지위가 높았던 분이라면 죽어서도 그 명예에 걸맞게 대우해야 한다는 정도로 받아들였다. <채근담>에 나오는 염량세태(炎凉世態·권세 있는 자에게 앞다퉈 아부하다가도 권세를 잃고 나면 모두 떠나 버리는 세상인심을 비유)나 우리 속담의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문 앞을 막지만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이 끊긴다’는 말처럼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다 같은 죽음이라도 표현은 제각각인 것을. 자연인이 생명을 잃는 사망(死亡)을 비롯해, 인간계를 떠나서 다른 세계로 간다는 뜻의 타계(他界), 윗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쓰는 별세(別世), 죽어서 세상을 떠난다는 서거(逝去), 영원히 잠든다는 의미의 영면(永眠), 고인이 되었다는 작고(作故), 하늘의 부름을 받아 돌아간다는 소천(召天) 등등으로.
대한민국 5번째(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 씨가 지난 23일 오전 숨졌다. 5·18에 대한 한마디 반성과 사죄 없이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그의 죽음을 ‘애도(哀悼·사람의 죽음을 슬퍼함)’할 수 있을 것인가.
25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전두환 씨 빈소에서 한 조문객이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어떤 죽음의 이름을 붙일 것인가
지난 23일 오전 전 씨의 사망 소식이 알려진 뒤 언론사들도 일제히 속보를 쏟아냈다. 대부분 ‘사망’이라고 표현했지만, 일부에선 ‘서거’와 같은 애도의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별세’를 사용한 곳도 더러 있었다.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된 이’의 경우 전직 대통령 예우 대상에서 제외한다.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했으니 호칭 역시 ‘전두환 씨’라고 하는 게 맞겠다.
주지하다시피, 전 씨는 역사에 씻을 수 없는 과오와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구순이 되도록 큰소리만 떵떵 치다 저세상으로 갔다. 그의 사망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애도하는 마음보다 착잡한 마음이 앞섰던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 정서상 어지간해선 망자에겐 관대한 법인데도 그에게는 애도하는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저 허망했다. 그가 세상을 잘못 살았다는 방증이겠지만, 국민들이 받은 상처도 그만큼 컸다.
■참회 없는 죽음 앞에 애도는 없다
그는 1979년 12·12 군사반란으로 헌법을 유린하고 권력을 찬탈했다. 간접선거로 11·12대 대통령에 올라 7년여간 철권통치를 하면서 민주 세력을 탄압하고 숱한 부정부패를 저질렀으며,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 이 과정에서 많은 광주 시민이 희생됐으며, 영문도 모르고 끌려간 삼청교육대에서 고초를 당하거나 죽은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언론을 통폐합해 정권의 나팔수로 만든 것도 모자라 불법 구금과 고문을 자행했다. 그런데도 희생자와 국민들에게 끝내 사과 한마디 남기지 않았다. 오히려 적반하장 격으로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항변했다.
물론, 전 씨는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반란수괴, 내란, 내란목적 살인 등의 죄목으로 무기징역이 선고되며 법적 단죄를 받긴 했다. 하지만 같은 해 12월 특별사면으로 석방됐으며, 그 이후에도 거짓과 왜곡을 일삼았다. 이런 그를 애도하는 마음을 갖고, 추모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참회 없는 죽음 앞에 애도는 없다”라는 어느 정당의 논평처럼 이렇게 적확한 표현이 또 있을까 싶다. 국가장(國家葬)이 아닌 가족장으로 치르는 것은 당연한 결정이고, 국립묘지 안장은 천부당만부당이다.
25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전두환 씨 빈소에서 육사 총동창회 회원들이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산 자에게도 성찰의 기회를
장례식장 풍경을 보면서도 생각이 많아졌다. 여느 전직 대통령과는 다르게 한산했다고는 하지만, 생전에 그와 인연을 맺었던 ‘신군부’ 세력과 제5공화국 실세들의 발걸음은 속속 이어졌다. 장례 의식이라는 게 살아 있을 때 맺었던 관계들과의 일종의 이별 의식일 텐데 그들은 전 씨와 다른 삶을 살았던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솔직히 어떤 죽음은 안타깝지만 어떤 죽음은 산 자에게도 성찰의 기회를 부여하는 법이다. 애도와 망각은 다르다는 한 철학자의 말도 기억났다.
상가에서 한 유족이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여기 오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했겠다!” 그 용기는 어떤 용기란 말인가. ‘사물을 겁내지 아니하는 기개’라는 뜻의 용기를 여기다 갖다 붙일 일은 아니라고 본다. 어떤 죽음은 용서와 화해를 의미하겠지만, 적어도 그의 죽음은 아니라고 본다. 그가 죽었다고 끝나는 문제는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죽음으로도 위로받지 못하는 현실은 국민을 학살하고도 고개 한 번 숙이지 않은 그가 초래한 것이다. 망자에게 미안하다고 말을 할 수 없다는 현실이 서글플 따름이다.
24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김점례 씨가 1980년 5월 당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진 아들의 묘소를 찾아 눈물 흘리고 있다. 김 씨는 전날 사망한 전두환 씨를 두고 "잘못했다는 한마디조차 없이 떠났다. 너무나 원통하다"며 통곡했다. 연합뉴스
■같은 날 대비된 5·18 부상자 죽음
전 씨가 숨지던 날, 공교롭게도 5·18 당시 총상을 입고 하반신이 마비된 한 피해자(68)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천수를 누린 가해자와 총상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통받다 숨진 피해자의 삶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분노와 탄식이 이어졌다. 그는 고(故) 조비오 신부와 함께 계엄군의 헬기 사격 목격담을 증언했지만 결국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5·18 기념재단의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5·18 자살의 계보학’을 보더라도 후유증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람은 1980년대 25명, 1990년대 4명, 2000년대 13명으로 조사됐다.
그에 비해 전 씨는 수감 2년 만에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뒤 평안한 삶을 살았다. 수사를 통해 전 씨의 불법 비자금 9500여억 원을 조성한 사실이 드러나 추징금 2205억 원을 내야 할 처지였지만 체납했다. 결국 강제 절차 끝에 1249억 원을 환수했으나 여전히 956억 원은 환수되지 않았다. 이런 중에도 전 씨는 “전 재산이 29만 원”이라고 주장했고, 신군부 세력과 호화 식사를 하거나 골프를 치러 다니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5공 피해자 11개 시민단체' 회원들이 25일 사과 없이 죽음을 맞이한 전두환 씨를 규탄하고, 재산을 피해자와 사회에 환원할 것을 촉구하는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두환의 시대 정말 끝났는가
5·18 그때로부터 4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피해자는 고통받고, 가해자는 멀쩡하게 살다가 저세상으로 가는 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가족들이라도 사죄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시 전두환을 비호하던 측근이나 정치권에 남아 있는 세력이 있다면 그들도 사과해야 한다. 잘못된 역사를, 만행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거듭 강조하지만 전 씨를 단죄하고 억울한 피해자의 한을 푸는 것은 산 자들의 몫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죽음과 무관하게 5·18 발포 책임자와 암매장 의혹 등에 대한 진상 규명 작업은 계속돼야 한다. 역사적 진실을 가리는 데 있어서 공소시효란 있을 수 없다.
전 씨의 미납 추징금 역시 집행되어야 한다.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추징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각자에게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전두환의 시대가 정말 끝났는가’ 하고.
김은영 논설위원 key66@busan.com
김은영 논설위원 key66@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