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현의 사람 사는 경제] 국밥에 대한 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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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회경제교육연구소장

옛 어른들 말씀에 “정구지 한 사발에 피 한 사발”이라고 했다. 정구지에는 철분이 많아 그만큼 조혈 작용에 도움이 된다는 뜻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정구지를 좋아했다. 생나물 무침도 좋지만, 살짝 데쳐서 조물조물 버무린 정구지 나물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반찬이다. 그런데 군에 입대하면서 나는 엄청난 문화 충격을 겪고 말았다. 군에서는 정구지를 정구지가 아니라 부추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지금은 둘 다 표준말로 인정받지만, 그때는 정구지가 아니라 부추만 표준말이었다. 고약한 문제는 바로 내가 우리 부대의 부식 담당이었다는 데 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마음으로 정구지를 볼 때마다 “이것은 정구지가 아니다. 이것은 부추다”를 되뇌어야만 했다. 아무튼 정구지면 어떻고 부추면 어떤가? 인터넷을 보니 부산 사람을 괴롭히는 방법 열 가지 가운데 첫 번째가 돼지국밥에 부추무침 안 주기란다. 도대체 이렇게 비인간적이고 잔혹한 생각을 누가 했단 말인가?

함께 고생하는 전우들 사이에
정구지냐 부추냐 논쟁은 불필요
 
민주당·국민의힘 대선 경선에서
같은 당 동지끼리 비난하고 헐뜯고
동업자에 대한 예의 부족 보여 줘
 
선거 후 국민들 상처 남을까 걱정

부산 사람들의 솔 푸드라고 하면 누가 뭐라고 해도 돼지국밥이다. 집 가까이에 제법 유명한 돼지국밥 가게가 있다. 그런데 돼지국밥을 좋아하면서도 나는 그 가게를 아주 가끔 갈 뿐 그리 자주 가지는 않는다. 이 가게에는 자기 집 육수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난다. 가령 국물을 마시면 콜라겐이 많아서 입술이 쩍쩍 들러붙고, 육수를 냉동실에 보관하면 묵처럼 된다는 문구가 여기저기 붙어 있다. 자기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높은 것은 괜찮다. 그런데 이어지는 문구가 좀 많이 불편하다. 제대로 낸 육수가 아니면 ○억을 주겠다는 말은 꼭 소비자들에게 싸워 보자는 듯이 들린다. 우리 집은 진짜 육수를 쓰는데 가짜 육수를 쓰는 가게가 많다는 주장은 대부분의 동업 음식점들이 제대로 된 음식을 내놓지 않는다는 말로 들린다. 일부 음식점에서 제대로 육수를 내지 않고 라면 수프를 쓴다거나 분유를 쓴다고 하는 이야기는 나도 들어 봤다. 하지만 그런 음식점이 있다면 콕 집어서 고발하면 될 일이지 막연히 가짜가 많다는 투로 동업자 모두를 의심받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 결과는 결국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이들 모두에게 피해가 될 뿐이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대선 경선을 보다가 같은 당의 동지라는 사람들이 저렇게 마구잡이로 공격하고 허물을 들추어내도 괜찮은가 생각했다. 그때마다 당직자나 국회의원 등 두 당의 관계자들은 원팀이라는 말로 경선이 끝나면 단합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막상 경선이 끝나 보니, 이재명 민주당 후보가 호남을 찾은 날 호남이 연고지인 이낙연 전 대표는 충청도에 볼 일이 있다고 자리를 비웠다. 국민의힘에서는 홍준표, 유승민 전 후보가 선대위에 이름을 올리는 것도 거부하고 윤석열 후보가 밥 한번 먹자는 요청마저 거절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동업자에 대한 예의가 부족했던 탓이다. 이제 각 당의 경선이 끝나고 이른바 본선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아마 상대 후보와 상대 정당을 향한 비난과 공격은 더 심해질 것이다. 동업자에 대한 예의는 아예 헌신짝처럼 버려질 터이다. 문제는 정치인이라는 사람들이 서로 어떻게 물어뜯고 싸우느냐가 아니다. 오직 대한민국이 더 나은 사회, 더 나은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후보 또는 저 후보를 지지했던 우리 국민들이, 그런 마음이 넘치다 못해 서로 밀고 당기고 비난하고 싸우다가 그 앙금이 선거 후에도 오랫동안 가슴 한구석에 칼을 품고 사는 일이다. 정작 싸움을 붙인 자들은 따로 있는데, 정치가들이 누리는 특권과 특혜를 손톱 한 조각만큼도 누려 본 적 없는 우리 국민들이 왜 서로 미워해야 하는가? 이럴 바에는 차라리 두 당의 후보가 국밥 한 그릇씩 앞에 놓고 권투나 씨름으로 겨루는 편이 훨씬 더 낫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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