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우의 맛있는 여행] 바츨라프 하벨 10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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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부 선임기자

해마다 가을이나 겨울에 프라하 여행을 떠나면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시작해 1989년 가을에 완성된 체코 민주화의 여정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다. 벨벳혁명 기념행사와 바츨라프 하벨 전 대통령 추모행사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체코의 국경일인 11월 17일에는 벨벳혁명 기념행사가 펼쳐진다. 프라하에서는 매년 수만 명이 바츨라프 광장에 모여 혁명의 기억을 되새긴다. 혁명 초창기에 전투경찰이 시위에 참가한 대학생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한 장소인 나로드니 거리의 ‘벨벳혁명 기념물’ 앞에서는 기념식이 거행된다.

벨벳혁명 기념행사가 끝나고 한 달 뒤에는 바츨라프 하벨 추모행사가 이어진다. 체코의 초대 및 2대 대통령으로 봉사하고 물러난 그는 2011년 12월 18일 일흔다섯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올해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되는 해다. 하벨은 1989년 반공산주의 벨벳 혁명을 주도한 반체제 작가이자 정치인이었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체코 국민들은 깊은 슬픔에 빠졌다. 주요 도시에 차려진 조문 시설에는 민주화의 영웅을 애도하는 국민들이 줄을 이었고, 많은 집의 창문에는 하벨의 사진이 내걸리기도 했다. 프라하 성 앞에서는 매일 밤 추모 촛불집회가 열렸다.

하벨의 장례식은 닷새 뒤 프라하 성의 성 비투스 대성당에서 국장으로 열렸다. 이른 아침부터 전국의 모든 성당과 교회에서는 추모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벨의 장례 행렬이 프라하 시내를 행진할 때 수만 명이 길을 따라 걸었다. 장례식이 열리던 대성당 밖에도 수만 명이 모여 민주주의의 수호자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건넸다.

지난 10년 동안 해마다 하벨 서거 기념일이 돌아오면 바츨라프 광장을 비롯해 프라하 곳곳에서 추모행사가 펼쳐졌다. 사람들은 하벨과 관련된 장소라면 어디든지 꽃, 심장 모양 장식을 가져다놓고 촛불을 밝혔다. 가장 눈길을 끄는 행사는 하벨이 생전에 남긴 책에서 철학적 의미를 가진 문구를 뽑아내 읽는 낭송 이벤트였다.

하벨 추모행사가 끝나면 이제 어둡고 슬펐던 과거의 시간은 지나가고 행복하고 따뜻한 시간이 다가온다. 바츨라프 광장과 구시가지 광장에 크리스마스 시장이 차려진다. 자원봉사자들과 정치인들이 두 광장에서 나눠주는 따뜻한 소고기 죽 한 그릇과 함께 새 봄을 기다리는 프라하의 아름다운 겨울이 시작되는 것이다.

코로나19 때문에 지난해에는 하벨 추모행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그의 서거 10주년이 되는 올해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한때 잠잠하던 체코의 코로나 상황이 악화돼 하루 확진자가 2만 명을 넘고 있기 때문이다. 프라하 여행 재개를 꿈꾸던 많은 사람에게는 실망스러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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