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말 광] 937. 아직 안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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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원 교열부장

놀랍게도 우리나라 언론의 한자말 실력은 별로 좋지 않다. 한자 세대가 아니면서도 예전에 쓰던 말을 답습한 결과다.

‘국민의힘 당권 레이스에 나선 이준석 전 미래통합당 최고위원이 지지율 1위를 기록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자, 그와 ‘페미니즘 대첩’을 벌여온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즐길 수 있을 때 맘껏 즐기라”고 17일 직격했다.’

이 기사에 나온 ‘대첩(大捷)’은 ‘큰 싸움’이 아니라 ‘큰 승리’라는 말. 하지만 우리 언론은 저렇게 ‘크게 싸웠다’는 뜻으로 자주들 쓴다. 이를테면 <‘그 아버지에 그 아들!’ 한·일 양국에서 펼쳐진 경마 대첩 결과는>이라는 제목. 대첩이 큰 승리라는 걸 모르니 ‘결과는’이라고 묻는다. <김혜수·윤아·설현.. 청룡 레드카펫 ‘겨울여왕 패션대첩’>이라는 제목 역시 큰 싸움 대신 큰 승리라는 말뜻 그대로 해석하면 꼬여 버린다.

며칠 전 경남 진주 남성문화재단이 재단을 해산하고 자산 34억 원을 경상국립대에 기탁했다는 기사가 쏟아졌다.

‘경상국립대는 김장하 이사장의 유지가 이어지도록 명칭을 보존하고, 증여한 재산의 운영과 목적사업 추진을 위해 재단의 기존 이사진이 참여하는 남성문화사업위원회를 구성, 공동 운영하기로 했다.’

거의 대부분 이런 식으로 보도했는데, 알고 보면 한자말을 잘못 써서 큰 실례를 한 셈.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표준사전)을 보자.

*유지(遺旨): 죽은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 가졌던 생각.(너무 잘난 체해서는 안 된다는 그 유지를 생각할 때, 하응은 부르르 온몸을 떨며 긴 한숨 한소리에 다시 자리에 펄썩 주저앉아 버린다.<박종화, 전야>)

*유지(遺志): 죽은 사람이 살아서 이루지 못하고 남긴 뜻.(유지를 따르다./…/자기 남편의 유지를 이을 만한 젊은이란 그리 흔치 않았다.<염상섭, 삼대>)

이러니, 어느 ‘유지’든 죽은 사람에게만 써야 하는 말인 것. 언젠가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 훈장을 ‘추서’한다는 기사도 있었다. 하지만 추서 역시 죽은 뒤에 하는 일. 표준사전을 보자.

*추서(追敍): 죽은 뒤에 관등을 올리거나 훈장 따위를 줌. 우리나라의 경우 긴급 상황에서 살신성인의 정신을 실천하다가 사망하거나 위급한 상황에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여 사회 전체의 귀감이 된 사람, 생전에 큰 공을 세워 국민의 존경을 받으며 덕망을 갖춘 사람에게 준다.(훈장 추서.)

한자말 제대로 쓸 자신이 없으면 안 쓰면 될 텐데…. 모른다는 걸 아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jinwo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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