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현의 사람 사는 경제] 징비록(懲毖錄)을 다시 써야 옳은가?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참사회경제교육연구소장

조선 선조 임금 때의 일이다. 왜의 동태가 수상하다는 보고를 받은 임금은 황윤길과 김성길을 통신사로 보내 적정을 살펴 오도록 했다. 그런데 서인인 정사 황윤길은 반드시 병란이 있을 것이라고 아뢴 반면에 동인인 부사 김성일은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아뢰었다. 이에 조정의 여론이 분분했으나 영의정 류성룡을 비롯한 동인들이 김성일의 주장을 옹호하자 선조도 다시는 병란을 입에 올리지 말라고 명하였다. 솔직히 사람의 심리가 나중 일은 어떻게 되든 당장 어려운 일, 복잡한 일은 피하고 싶어하기 마련이다. 그 다음에 어떤 역사가 벌어졌는지는 우리 모두가 아는 바이다.

류성룡의 <징비록> 교훈
지난 잘못을 꾸짖어
앞으로 후환 경계해야

코로나19 확산세 심각하나
정부의 코로나 방역 조치
과거보다 달라진 게 없어


왜란이 끝난 후에 류성룡이 쓴 <징비록>을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들이 왜 헛된 보고를 올려 전란을 예방하지 못하게 했느냐고 책망하자 김성일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라고 왜가 침략할 줄 몰랐던 것은 아니나, 전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면 백성들이 불안해 할 것을 걱정했노라.” 참으로 해괴한 변명이다. 집에 불이 나면 큰 소리로 식솔들을 깨워 불을 꺼야 옳거늘, 사람들이 놀랄까 봐 집이 홀랑 다 탈 때까지 기다리기만 했다는 말이다. 다만 여기서 학봉―김성일의 호―선생을 위한 변명 한마디를 덧붙이면 이 이야기는 류성룡이 김성일의 주장을 옹호했던 자신의 허물을 덮고자 지어낸 이야기라는 설이 많다. ‘징비(懲毖)’는 중국의 경전인 <시경>에 나오는 말로, “지난 잘못을 꾸짖어 앞으로의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는 뜻이다.

단계적 일상 회복 조치를 실시한 지 한 달 만에 코로나19 확진자가 하루에 5000명을 넘어서자 정부가 방역을 강화하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그 내용을 들여다보니 사적 모임의 허용 인원을 수도권은 4명, 비수도권은 6명으로 제한한다는 정도의 미봉책이다. 방역 담당자들은 일상 회복 조치를 취소하고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도 정부, 특히 대통령의 반대가 워낙 강하다고 한다. 정부가 이렇게 이쪽저쪽 눈치만 보는 이유는 방역과 민생을 모두 잡자는 뜻일 터인데, 결과는 게도 구럭도 모두 놓친 꼴이다. 그런 사이에 하루 확진자는 7000명을 넘어섰다. 정부는 확진자가 만 명이 넘어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지금 현장에서는 병상이 부족해 환자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있다. 코로나 사태가 벌어진 지 2년이 되도록 가장 필요한 의료 인력조차 제대로 확충하지 못한 무능력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세계가 K-방역을 부러워한다고 자화자찬하는 뻔뻔함은 더 놀랍다.

코로나 사태 처음부터 우리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자영업 영업시간을 오후 10시에서 9시로 줄인다느니 모임 인원을 5명으로 줄인다느니 하는 숫자놀음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코로나 사태를 종식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벌써 일상을 회복했어야 옳다. 한 마디로 입으로는 사태의 심각성을 말하면서 당국자 누구 한 사람 진심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는 말이다. 사적 모임의 허용 인원이 10명이었을 때, 방역의 최고책임자인 김부겸 총리가 지인들과 11명이 모여 식사를 해서 구설수에 오른 일이 있다. 총리의 변명은 지인 9명을 초대했는데 배우자 한 분이 더 오시는 통에 ‘인정상’ 식사도 못하고 가시게 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하기야 우리 국민들이 너나없이 참으로 인정 많은 이들이 아닌가. 하지만 나 같은 필부라면 모르되 총리가 인정으로 일하는 자리는 아니다. 김부겸 총리의 변명이 잘못된 것은 10명을 넘고 안 넘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시급한 때에 총리가 한가히 지인들과 식사자리나 가졌다는 그 한가로운 마음이 더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이게 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놀라고 불안해 할 것을 걱정한 덕에, 총리가 몸소 일상 회복을 먼저 보여 주시려는 깊은 뜻이었다고 변명한다면 더 할 말은 없다만 말이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