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광대들/최승아(19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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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면 위에 가면을 덧씌웠다 가면 뒤에 숨어 목청을 허스키로 갈아 끼웠다 소품으로 웃음을 그려 넣자 우리는 웃지 않고도 웃을 수 있었다 분장이 끝나면 우리는 조금씩 누군가의 얼굴이 되어갔다 리듬에 맞춰 허밍으로 노래를 불렀다 노래는 부메랑으로 돌아와 후생의 우리를 겨냥했다 바닥이 공중을 매달았지만 누구도 매달리지 못했다 구름을 지우자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졌다 웃고 있었는데 흘러내린 건 눈물이었다 박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객석은 침묵했다 무대 밖을 뛰쳐나가려다 안으로 넘어졌다 리허설은 끝이 났다 조명을 벗자 젖은 발이 꿈속으로 말려들어 갔다 -시집 (2019) 중에서-


천국과 지옥의 공통점은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문 입구에는 다음의 문구가 있다.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현실의 문은 누구나 자기가 원해서 열고 들어가는 문이다. 문을 여는 주체인 자아는 스스로 문을 열어 타자에 의해 만들어진 다른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주체인 자아가 만들어 놓은 일상은 타자의 일상인 환상에 의해 상처받는다. 타자에 의한 상처는 모든 주체가 가지고 있으며 타자의 주체도 같은 원리로 상처받게 된다. 시인은 타자로 통하는 문을 열고 거기서 확인된 상처를 시로써 소통하고자 한다. 상처를 가면으로 덧씌우고 분장을 해서 남의 얼굴을 대신 가질 수 있어도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의 상처를 지우며 희망을 키워가는 것이 삶이다. 상처의 문 뒤에는 또 다른 상처와 또 다른 희망이 기다리고 있다. 삶이라는 무대, 여기는 천국도 지옥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규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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