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시대 문화풍경] 세기의 전통과 변화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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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국어교육과 강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단독 공연을 꼽으라면 단연 비엔나 필하모니커(Wiener Philharmoniker·이하 빈필)의 신년음악회다. 무지크페라인 황금홀에서 직접 관람하는 일이 클래식음악 애호가들의 버킷 리스트에 들어있을 정도라 하니, 가히 세계적인 문화상품이라 할 수도 있겠다. 이 공연의 기원은 1939년 12월 송년음악회이며, 1941년 1월 1일 첫 신년음악회로 이어졌다. 나치의 선전정책과 무관하지 않아 참혹한 역사의 거울이기도 하지만, 80여 년 세월 동안 빈필 신년음악회는 새해의 문을 활짝 여는 희망의 선율로 자리잡았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만큼 사연도 많다. 경쾌하고 흥겨운 춤곡들로 구성되는 프로그램은 슈트라우스 가문의 왈츠가 대다수다. 특히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은 매년 빠짐없이 연주되는데, 연주 직전 악단과 지휘자는 객석을 향해 으레 신년 인사를 건넨다. 빈필의 왈츠 연주는 독특하다. 왈츠는 보통 첫 번째 박자에 강박을 주는 주법을 취한다. 빈필의 왈츠는 첫박에 엑센트를 두면서도 두 번째 박자로 리듬이 자연스럽게 흘러 춤곡의 묘미를 한층 더한다. 음악회의 마지막은 언제나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라데츠키 행진곡>이 장식한다. 지휘자가 객석으로 돌아서면 관객들은 박자에 맞춰 신나게 손뼉을 친다. 꽃장식도 빼놓을 수 없는 전통의 하나다. 무대와 벽면, 기둥 사이에 화려하게 만발한 꽃들은 황금빛 공연장과 눈부시게 어우러지며 생기를 북돋운다.

전통의 고수는 특유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한편 변화를 더디게 한다. 가령, 1991년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프로그램 선정의 전통에서 벗어나 슈트라우스 곡과 함께 모차르트와 슈베르트의 춤곡을 선보였다. 하지만 이후 그는 다시 이 무대에 초대받지 못했다. 이는 빈필 특유의 뿌리 깊은 보수성과도 무관하지 않다. 빈필은 주법이나 악기, 단원 채용까지 옛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려는 단체로 유명하다. 1842년 창단 이후 빈필이 처음으로 여성 연주자를 채용한 해는 1997년이다. 그마저도 출연 빈도가 낮은 하프 주자였다. 그러나 이처럼 견고한 보수성도 코로나19 팬데믹으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했다. 지난해 빈필 신년음악회는 무관중으로 진행했다.

2022년 신년음악회는 다니엘 바렌보임의 지휘로 열렸다. 다행히 무관중 사태는 모면했지만, 관객은 1000명으로 제한되었으며 철저한 방역지침이 제시됐다. 슈트라우스 일가의 영원한 숙적 카를 마이클 지러의 <밤 올빼미 왈츠>가 은근슬쩍 자리했지만 화려한 꽃장식은 여전했다. 해마다 새해 아침이 밝아오듯 세월은 흐른다. 제아무리 유서 깊은 전통이라 해도 세상의 변화를 거스르기란 어렵다. 가뜩이나 변화가 격심한 시절이다. 법고창신이라 하지 않았던가. 안정적인 리듬 속 흥겨운 변화를 희망해 본다. 3박자의 왈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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