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감수성 강요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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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파 동아대 기초교양대학 교수 공모 칼럼니스트

감수성의 시대이다. 인권 감수성, 동물 감수성부터 로봇 감수성까지 매일 새로운 감수성이 출현하면서 우리에게 세심한 주의를 요구한다. 감수성이 결여된 말을 내뱉을 경우 보통은 꼰대로 불리거나, 심하면 혐오주의자로 낙인이 찍힌다. 따라서 혹시라도 차별 표현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쉽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 관용적으로 쓰던 말들이 차별 혹은 혐오 표현으로 새로 지정(?)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비교적 최근 논란이 된 ‘깜깜이’를 살펴보자. 정은경 중앙방역대책본부장은 감염 경로를 알 수 없는 환자를 지칭하는 ‘깜깜이 환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깜깜이라는 용어가 시각장애인에 대한 차별 표현이라는 지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인권·동물·로봇 감수성 등 최근 봇물
주의 없이 사용 땐 무개념 낙인찍혀
‘차별·혐오 표현 지양’ 취지는 긍정

하지만 무비판적 강조는 폭력적
표현 자유·공론화 논의 파괴 가능성
민주주의 바탕, 갈등 유발 경계해야


이에 소설가 장강명 씨는 ‘깜깜이라는 말은 혐오 표현인가’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깜깜하다’를 명사화한 깜깜이란 말은 시각장애인과 관련이 없기도 하거니와,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을 모두 금지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물었다. 반면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깜깜이, 그렇게 쓰고 싶으면 써라’라는 칼럼에서 무심코 반복해 오던 언행이 누군가에 대한 차별임을 깨닫거나 지적받았을 때 이를 수용해 개선해야 한다며 굳이 차별적 표현인 깜깜이를 사용해야 하는지 되물었다.

깜깜이 논쟁은 사회에서 관용적으로 쓰는 표현이더라도 누군가를 차별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을 경우 해당 표현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주장과 ‘틀딱충(틀니를 딱딱거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노인을 비하할 때 사용하는 말)’처럼 누가 보아도 혐오 표현인 경우 외에는 차별 표현으로 분류하면 안 된다는 주장의 대립으로 요약된다.

언어는 뜻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하는 속성이 있다. 이 때문에 본뜻에는 차별의 의미가 없다고 하더라도 차별 내지 혐오 표현으로 사용된다면 그 표현의 사용을 지양해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차별 표현을 누가 어떤 기준으로 정하느냐이다. 차별 표현에 대한 감수성이 높은 운동가, 단체, 학자들은 차별 대상이 되는 당사자가 해당 표현을 불편해한다면 그 표현은 차별 표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대로 어떤 표현을 차별 표현이라고 선언할 때 실제 당사자들의 의견을 취합하였는지는 의문이다.

중앙일보 카드뉴스는 ‘중대본이 ‘깜깜이’ 표현 안 쓰겠다 한 이유’에서 깜깜이가 차별 표현이라는 근거로 장애인먼저실천운동본부가 2019년 발표한 ‘장애 관련 올바른 용어 가이드’를 제시했다. 그러나 해당 자료에 깜깜이는 등장하지 않는다. 당사자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자기주장을 위해 허위 근거를 댄 사례다. 이외 차별 표현과 관련된 여러 논의에서도 특정 표현이 차별 표현이 되는 어원, 담화 분석적 설명은 많지만 당사자들의 의견을 객관적 방법으로 취합해 근거로 제시한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당사자주의를 외치지만 정작 당사자 의견은 없고, 주장을 위한 주장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더 큰 문제는 감수성을 강조하는 과정이 폭력적이라는 데 있다. 어떤 사람에게 차별 표현으로 들릴 수 있는 발언을 하였을 때 감수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그 발언자를 차별주의자로 낙인찍고 조리돌린다. 심지어 고소·고발도 마다하지 않는다. 해당 표현이 정말 차별 표현인지, 그 사람의 발화 의도와 맥락에 비추어 봤을 때 차별의 목적을 가지고 표현을 사용하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를 제기하고 공론화하는 순간 나 역시 그 사람과 같은 차별주의자로 낙인찍힐 위험이 있다. 공론화가 파괴되는 메커니즘이다.

감수성 강조의 폭력성은 때때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기도 한다. ‘개그는 개그일 뿐 오해하지 말자’라며 사회를 풍자하고 웃음을 주던 개그콘서트는 온갖 차별, 혐오 논란에 몸살을 앓다 20여 년 만에 폐지되었다. 풍자마저 혐오로 낙인찍혀 사라진 요즘, 감수성은 일면 무서운 독재자의 모습을 보여 준다.

감수성은 강조되어야 한다.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표현과 행동을 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에게 매우 익숙해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차별 표현에 대한 문제 제기도 활발히 이루어져야 한다. 익숙한 차별 표현일수록 그 차별을 당연하게 생각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다양한 생각을 공론의 장에서 토론하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과도한 감수성 강요가 공론 과정을 파괴하고 표현의 자유를 제한해 민주주의를 퇴보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또 다른 차별과 갈등을 양산하는 것은 아닌지 경계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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