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이 요동 벌판을 통곡하기 좋은 곳이라 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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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연구 / 김명호

<열하일기 연구>는 연암 연구에 오랫동안 매진해온 김명호 전 서울대 교수의 저작으로 32년 만에 나온 개정증보판이다. 1부의 ‘서론’과 ‘결론’ 사이에 ‘저작의 형성 배경’ ‘중국 현실의 인식과 북학론’ ‘표현 형식상의 특징’ ‘당대 문단에 끼친 영향’이 배치돼 있고, 2부에는 논문 3편이 실려 있다.

열하일기는 당대 최첨단 문명 ‘청’ 통해
조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말하고자 해
‘호곡장’은 광대한 세계 문명에 대한
기쁨과 슬픔 뒤섞인 착잡한 심정 대변

왜 <열하일기>는 끊임없이 문제가 되는가.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시대와 치열하게 싸웠다. 그 싸움의 최전선에 놓인 것이 <열하일기>였다. “열하일기에는 연암의 위대한 창조 역량이 평생에 걸쳐 이룩한 모든 예술적 성과들이 집약되어 있다.”(385쪽) 이미 김현과 김윤식은 <한국문학사>에서 <열하일기>는 우리 근대의 대표적 저술이라고 했다.

<열하일기>는 다른 연행록과 서술 차원을 달리했다. 그것은 매우 의도적이었다. <열하일기> 여정은 오로지 중국 부분만 나온다. 조선의 시시콜콜한 여정은 일절 없었다. <열하일기>는 당대 세계의 최첨단 문명이었던 청(靑)을 기록 관찰하면서 조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말하고자 했던 거다. 연행록 형식을 빌린 빼어난 개혁 사상서다. 새로운 사상을 피력하기 위해 연암은 두 가지를 수행했다. 하나는 이전의 모든 연행록을 섭렵했다는 거고, 다른 하나는 청나라에 가서 정말 꼼꼼하게 취재를 했다는 거다. 실사구시, 취재가 실학의 핵심이었다. <열하일기>는 통곡한다. 요동 벌판을 마주했을 때 “통곡하기 좋은 장소로다!”라는 외마디를 쏟아낸다. 저 유명한 ‘호곡장(好哭場)’ 대목이다. 통곡은 “광대한 세계 문명의 중심으로 나아가는 환희”(71쪽) 때문이었다. 그것은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착잡한 것이기도 했다. 제대로 울고 통곡해야 시대가 열리는 거였다. 조선 르네상스를 이끈 정조와 연암의 만남은 어긋났다. 정조 초기, 홍국영이 설치는 억압적 정권 분위기 속에서 연암은 울울해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중국에 내디딘 첫걸음에 통곡이 터져 나왔을 법하다.

연암이 연행에 따라나선 것은 그의 나이 43세, 무르익은 나이였다. 당시는 1780년, 서구에서는 모차르트, 루소, 칸트, 베토벤 등이 살았다. 연암은 그 이름들과 견줄 때 미흡하다고? 그렇지 않다. 우리 근대와, 그 근대를 비추는 현재를 우리는 완전히 새롭게 봐야 하는 거다.

연암은 1780년 연행을 다녀온 뒤 3년에 걸쳐 열하일기 저본을 완성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20년 이상 계속 손을 봤다. 중간에 정조 문체반정의 철퇴까지 맞았다. <열하일기>의 이본은 50여 종에 달한다고 한다. 그만큼 문제작이 <열하일기>인 거다. 저자가 보기에 우리의 성리학 역사는 3차례 혁신을 거쳤다. 여말선초의 1차 혁신이 조선을 건국했다면 조선 후기와 개화기에 해당하는 2·3차 혁신은 조선 건국 같은 외적 결과를 만들기보다는 우리 역사 속에 내적으로 응축됐다. 그 응축기 속에 열하일기는 50여 종에 이를 정도로 굴절 교착되었던 거다. 그러니 이제 매끈하게 봐야 한다는 거다.

한반도 사상의 대단한 점은 동서를 융합하는 거다. 서학이 학문으로 뿌리내려 저절로 신앙으로 나아간 것은 세계에서 조선이 유일했다. 저자는 “실학이 가져온 혁신의 원동력이 서학에 있었다”고 말한다. <열하일기> 도처에 그런 점이 있다고 한다. 홍대용을 통해 지동설을 알고 있었고, 그런 눈으로 청나라의 수레 벽돌 선박 등의 문물에 연암은 주목했다. 장차 동서를 융합하려는 사상적 움직임은 개화사상으로 이어질 것이었고, 동학으로 거대하게 분출될 것이었다.

연암은 깊었고 활달했다. 외설도 잘 구사했다. “내 물건이 불끈 일어설 때, 내가 곧 한 주먹으로 죽어라 때렸더니, 그 물건이 한 번 찍 소리를 내지르며 배냇젖 한 모금을 죄다 토해 버리고 저 거북등껍질 속으로 후다닥 들어가서는….”(483쪽) 연암의 활달한 문체는 한국 현대문학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실감’으로 넘친다. 연암은 <장자>를 한 줄로 꿰고 있었고, 문·사·철의 결정판인 <사기>의 문체를 체득하고 있었다고 한다. 새로운 문체의 구사는 새로운 세계의 실현이었다. 김명호 지음/돌베개/842쪽/4만 5000원.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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