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택 단장 "대한민국 자주국방 정밀기술 이끈 도미기사는 영웅입니다"
[자주국방인in人] 9. 강영택 도미기사 단장
철마산 자락 국방부 조병창 자리 잡기부터
기사단 도미 연수와 공장 건립까지 오롯이
[자주국방인in人] 9. 강영택 도미기사 단장
국방부 군수발전 계획단에서 근무하던 강영택 중령은 국방부 군수차관보 신원식 소장을 단장으로 하는 일행 5명에 포함돼 1971년 1월 29일 오후 4시 NWA기편으로 미국으로 떠났다. 한국에 M16소총공장을 짓는 문제를 미국 콜트사와 담판 짓기 위해서다. 협상단의 실무 막내 격인 강 중령은 실무 담당자인 군수기획관 자격으로 함께 했다.
단장 신원식 소장, 이해량 해군준장(국방부군제담당관), 석룡영 대령(국방부관리차관보 보좌관), 김사묵 중령(군수기획관), 강영택 중령(군수기획관)은 약 2주 동안 미국에 머무르면서 한국에 M16소총공장을 건설하는 기술협정을 마지막으로 검토하고, 미국방부 '펜타곤' 실무자들과 1500만 달러 방위차관 문제도 논의했다.
"당시 현역 군인 신분으로 공대 기계과를 나온 사람은 흔치 않았어요." 1972년 미국 콜트사 M16소총 기술 연수 도미기사단 단장으로 26명의 영웅과 함께 1년 동안 대장정을 진행했던 강영택(88) 단장을 만났다.
강 단장은
강 단장은
강 단장은
1971년 1월 30일 군수기획관(중령)-신원식 소장 도미단 참여해 콜트사와 기술협정 검토
1971년 4월 9일 국방부 조병창 착공
1971년 12월 도미기사단 모집
1972년 1월 도미기사단 미국 연수
1972년 4월 12일 대통령령 제6136호 설치령
1973년 11월 29일 조병창 건물 완공(창장 유삼석 육군 소장)까지의 과정에서 국산 M16의 역사와 함께 한 인물이다.
"고향이 제주시 삼양동입니다. 1953년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육사 13기로 군에 입대했습니다."
강 단장은
강 단장은
강 단장은
철마산 자락에 기틀 마련
육군조병창에서 생산한 예광탄과 조명탄을 실험하기 위해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던
강 단장은
나중에 국방부 조병창 위치를 선정할 때 강 단장의 경험은 소중하게 쓰였다. 애초 소총을 전문적으로 생산할 국방부 조병창은 지하 공장을 염두에 뒀다. 애초 계획대로라면 철마산 중턱에 터널을 뚫어 무기공장을 짓는 것이었다. "몇 차례 미국 연수를 다녀온 제가 실무 자격으로 지하 공장은 좋지 않겠다고 건의했습니다. 당시 북의 무기 공장이 주로 땅굴 속에 있었기에 우리 군도 그렇게 계획했습니다. 하지만, 지하 공장은 공사 기간이 서너 배 소요돼 제때 계획한 대로 무기 공장을 지을 수 없어 지상 공장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습니다."
강 단장은
"마침내 공장 설계 기술 담당이 지상 공장을 결정했는데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이후 창원공단에 있는 방산공장도 다 지상에 배치했는데 국방부 조병창의 위치 결정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강 단장은
정밀기술의 초석을 놓다
미 콜트사와 기술협정을 체결하자 대한민국은 소총 생산 기술을 배워 올 도미기사단을 모집한다. 1971년 26명의 요원이 모집됐다. 애초 콜트사는 기술 이전을 하기보다는 턴키방식의 협정을 원했다. "턴키베이스로 하자고 했어요. 자기들이 한국에 와서 공장도 짓고, 설비도 만들어 완성총을 만들 때까지 완벽하게 한 다음에 공장을 통째로 넘겨주겠다는 것이죠. 실무진들이 '절대 안 된다'고 반대했습니다."
강 단장은
"기술자를 우리가 뽑고, 우리가 가서 기술을 배워오겠다고 했습니다. 콜트사가 물론 갑의 입장이었지만, 끝내 우리 주장이 관철돼 도미기사들은 1년 동안 미국 연수를 통해 정밀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습니다."
강 단장은
탁월한 선택 ‘범용 장비’
당시 콜트사는 이미 소총 대량 생산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렇기에 콜트사는 한국 소총공장도 컨베이어식 대량생산체제를 권유했다.
강 단장은
강 단장의 생각은 적중했다. 1973년 철마산 자락 국방부 조병창에 총기 생산 장비를 설치할 때 도미기사들이 장비 설치 업무를 직접 담당했다. 그 이유가 있다. 장비를 선정하고, 검수하고, 필요한 장비 사용법을 익힌 장본인이 바로 도미기사이기에 그렇다.
"도미기사 한 명 한 명이 장비 숙련자이자 검수자 역할을 했습니다. 국내 공장에 장비를 설치할 때도 콜트사 직원들과 대등하게 일했습니다. 설치 과정에 후배 기사들에게 사용법을 알려주며 자연스럽게 교육하는 시스템이 마련되었습니다." 만약 통째로 장비가 들어왔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범용 장비는 실제로 자랑스러운 국산 K계열 소화기 개발의 자양분이 되었다.
정밀기술의 효시를 쏘다
범용장비는 도미기사와 국내 기술자들이 분해조립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하게 다룰 수 있었다. 향후 이 범용장비는 다목적으로 활용되었다. 콜트사도 처음엔 전용 장비를 고집하다가 한국 측의 끈질긴 요구에 결국엔 인정해줬기에 이룰 수 있었던 성과다. 1973년 3월부터 소총 공장은 시운전에 들어갔다. 장비 설치와 생산 과정이 잘 맞아
강 단장은
강 단장은
강 단장은
"M16총열을 만든 우리 김연곤 도미기사가 벌컨포 총열 생산에 참여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생각했던 자주국방 복안이 그대로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강 단장은
기술보국의 정신을 잇자
강 단장은
강 단장은
"당시 코네트컷 주립대학(UConn) 교수였던 송자(교육부 장관 역임) 연세대 총장님의 환대를 잊을 수 없습니다. 한인회에는 교수 의사 등 전문직 종사자들도 많았는데 당시 이응림 한인회장을 중심으로 우리 기술인을 무척 챙겨주셨습니다."
강 단장은
글로벌 전문 소화기 전문 기업 SNT모티브에도 "탁월한 소화기 개발 능력과 생산 기술로 세계 1위 소화기 기업으로 성장해 대한민국을 빛내 주시기 바랍니다." 노병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펴졌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꼭 한번 SNT모티브를 방문하고 싶습니다. 철마산이 그립네요." 서울에 거주하는 강 단장의 눈길이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요산 김정한 선생은 1973년 11월 29일 국방부 조병창 건립 기념 비문에 이렇게 새겼다. '국방은 한 나라의 존립을 보장하는 최대의 요건. 방비를 등한히 해 외적의 침략을 받았던 치욕스러운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 말자. 여기 자주국방을 다짐하는 무기 생산의 터전을 마련했다. 우람한 가동 소리는 조국의 영원한 안전과 자유를 굳건히 보장하리라.' 선생의 말씀을 축약했지만 대한민국 자주국방의 시원이 부산 기장군 철마면 전 국방부 조병창이다. 조병창은 (주)대우정밀로 민영화한 뒤 현재 SNT그룹(회장 최평규)의 SNT모티브로 발돋움했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자주국방의 대의는 면면히 이어진다. 그 거룩한 여정에 묵묵히 복무한 이들을 발굴해 <부산일보>는 ‘자주국방 인in人 시리즈’를 지면과 온라인에 연재한다. 모든 영웅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를 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는다.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