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다른 생명과 함께 산다는 것에 대하여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김남석 문학평론가

어쩌다 보니 강아지와 함께 살게 되었다. 먼 친척이 키우던 강아지였는데, 키울 수 없는 사정이 생겨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결국 나에게까지 오게 된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은 우연이거나 운명이겠지만, 그 안에는 이 강아지를 버릴 수 없는 이유도 함께 들어 있다.

우선, 이 강아지가 애견숍을 거쳤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개를 사고파는 것이 자유로운 나라이다. 거리에는 휘황찬란한 애견숍이 버젓이 자리를 잡고 있고, 사람들은 더욱 좋은 개를 사겠다고 애견숍으로 몰려가고 있다. 내 돈으로 개를 사는데 무엇이 문제냐고 묻을 사람들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개는 재화 이전에 생명이고, 상품 이전에 영혼을 가진 존재이다. 아무리 개를 인간 아래로 보는 세상이라고 해도, 개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거나 자유롭게 소유할 수 있는 물품으로 여길 수 있는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한다.

‘생명’ 쉽게 사고파는 사람 늘면서
거리마다 휘황찬란한 애견숍 등장
인간의 욕망 ‘강아지 공장’까지 고안

자격 없으면 소유·돌봄 못 하도록
존엄한 생명체 걸맞는 제도정비를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생명을 사고파는 일, 즉 개를 애견숍에서 사는 풍조가 늘어나면서, 구매자들이 좋아할 만한 강아지를 대량생산하는 일에 골몰하는 업자들도 늘어났다. 이러한 업자들은 개들이 계속해서 임신과 출산하는 방식을 고안해내었다. 이른바 강아지 공장이 탄생했고, 번창했으며, 이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자 이를 교묘하게 숨기는 방식 역시 고안했다. 나에게 온 이 강아지도 이러한 공장을 거쳐야 했고, 일찍 어미 품을 떠나는 바람에 분리불안을 앓게 되었다.

개를 돈으로 사고파는 사람도 문제이지만, 그렇게라도 이 세상에 나온 강아지를 끝까지 돌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도 문제는 있다. 개인적 사정으로 강아지를 보내야 한다고 했지만, 내가 전해 들은 사연은 강아지를 포기할 정도의 사정은 아니었다. 더구나 나에게 온 강아지의 상태는 매우 딱한 상태였다. 주기적으로 산책을 한 흔적이 거의 없고, 몸에는 근력이 충분하지 않았다. 인간들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해 미용을 하고 인간의 관심을 끌 만한 개인기 몇 가지는 익히고 있었을 뿐, 정작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 요구되는 기본 체력이나 스트레스 해소 같은 돌봄의 흔적은 찾기 어려웠다. 전 주인은 개를 쓰다듬고 간식을 주기는 했을 테지만, 개를 산책시키거나 개의 존엄을 위한 조치는 취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래서야 강아지를 키웠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강아지를 데려오기로 한 이유 중 또 하나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다. 이 개는 이른바 품종견이라서 새끼를 받아 경제적 이득을 취하겠다는 사람들이 주변에 널려 있었다는 것이다. 강아지 공장에서 와서 다시 강아지 공장으로 돌아가야 하는 셈이니, 이 강아지를 포기할 수 없었다.

옛날에는 개를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키웠다. 개는 철저하게 집안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존재여야 했다. 그래서 때로는 사냥개가 되어야 했고, 때로는 식용 단백질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세상은 올바른 세상이 아니다. 이제는 사람들도 개가 소유물이기 이전에 생명을 가진 존엄한 존재라는 사실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개를 통해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 개를 개인적 애완견으로만 취급하려는 사람들의 숫자 역시 덩달아 늘어나는 추세이다. 단호하게 말하지만, 개의 생명과 존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개를 키울 자격이나 관련 업무를 맡을 권리가 허용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외국의 선진 사례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개는 자격을 갖춘 이들만 키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인간의 불필요한 욕망에 희생되는 개가 줄어들 것이다. 그러한 개가 줄어든 세상이라야, 그만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약자로서의 인간 역시 자연스럽게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