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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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참 (1973~ )

녹색 원피스 여인이 붉은 꽃 가득한 옥상에서 피 묻은 빨래를 걷을 때, 어디선가 들리는 총성, 여인은 향나무로 둘러싸인 무덤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화약 냄새가 퍼지는 무덤 옆에서 연두색 풀들이 돋아나고, 무덤 뒤 향나무 숲에서 새들이 운다. 새들은 보이지 않는데 울음소리만 숲을 흔들고 있다. 숲에서 마을로 이어진 길 따라 램프를 든 아이들이 걸어나온다. 흔들리는 램프 불이 어둠을 밀어낸다.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니고 새벽도 아닌데, 어디선가 다시 총성, 녹색 제복 군인이 지붕 밑으로 떨어진다. 그와 함께 떨어진 군장에서 초록 뱀들이 쏟아져 나온다. 붉은 원피스 여인이 빨래통 들고 옥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올 때, 어디선가 다시 울리는 총성, 누군가 가슴을 움켜쥐며 쓰러진다. 어디선가 음악이 들려온다. 느리고 무거운 춤곡이다. 누군가 마지막 숨을 쉬는 동안 무덤 옆에서, 붉은 꽃 가득한 옥상에서, 이끼 가득한 우물 뒤 음지에서 긴 잎 늘어진 녹색 풀들 빠르게 자라고 있다.
- 2021년 12월호에서

녹색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빨래통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으나, 내려올 땐 붉은 원피스 여인이 되어있다. 여인이 옥상에 있는 동안 총성이 울렸기 때문이다. 시인은 비트처럼 숨가쁜 순간을 제시하고 있다. 어떤 아포리즘 없이, 독자가 스스로 사유하게 하는 방식을 취한다. 언제나 풍부한 색감의 언어를 가졌다는 점에서 시인은 살바도르 달리를 닮았다. ‘녹색 제복 군인이 지붕 밑으로 떨어진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침공으로 처한 상황을 예감한 듯 하다. 총성은 무덤을 남기고, 사람이 떠난 우물 뒤 음지에선 녹색 풀들만 우거질 것이다.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성윤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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