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삼의 타초경사(打草驚蛇)] 만파식적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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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대 자유전공학부 특임교수

대통령선거 전날이다. 누가 대통령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선거가 끝나도 나라가 거의 절반으로 나뉠 것이라는 데는 누구나 동의한다. 원로들은 누가 대통령이 되든 국민통합이 급선무라고 주문하고 있다. 정치학계 원로,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는 다음 정부의 할 일은 오로지 “통합, 통합, 통합뿐!”(3월 초 <중앙일보> 인터뷰)이라고 절실하게 요청한다.

갈등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나 반으로 딱 나뉘는 분열은 심상치 않다. 통합은 강력한 힘으로 사람들을 묶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겐 마음이 있으니 그 마음을 하나로 모을 때 통합이 가능하다. 권력투쟁으로 사회적 갈등이 심각했던 춘추시대. 통합을 위한 공자의 처방은 ‘화이부동(和而不同)’이었다. 부동은 ‘같지 않다’라는 말이니 곧 ‘다르다’는 뜻이다.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또 다름을 이해한 바탕에서 하나로 화합하는 것이 화이부동이다. 화목을 위한 첫 단계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인데, 이것이 생각보다 어렵다.

다름 인정하고 상대를 이해하는 노력
경청 통해 마음 모으는 게 통합 이루는 길
갈등 치유의 지혜 만파식적 필요한 때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쓰는 말투를 보면 알 수 있다. ‘다르다’라고 써야 할 말을 ‘틀리다’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언젠가 저녁밥 먹으면서 시청한 ‘6시 내 고향’에는 경남 거창의 한 농사꾼이 어른 머리통보다 큰 수박을 안고서 “우리 거창 수박과 타지의 수박은 틀립니다!”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었다. 화면 아래 자막에는 ‘틀립니다’를 ‘다릅니다’로 교정한 문장이 흐르고 있었고.

‘다르다’에는 상대방의 주체성을 인정하고 그와 더불어 하겠다는 의지가 들어 있다. 다르다가 지향하는 세계는 다양성이다. 코스모스가 단색의 꽃 일색이 아니라 여러 색깔의 꽃들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또 서로 다른 목소리가 하나의 질서를 이룰 때 화음이 되는 것과도 같다.

반면 ‘틀리다’는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고 (혹은 못하고) 자기 뜻을 상대방에게 관철하려는 의지다. 집안에 ‘가화만사성’이라는 글귀를 걸어놓고도 ‘자식이 부모와 다르다’는 사실을 종종 잊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집을 떠나려는 아이들이 많은지 모른다. ‘다르다’를 ‘틀리다’로 바꿔 쓰는 우리네 말투는 상대방을 지배하려는 무의식의 표출이다.

다름을 인정하기보다 더 어려운 것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일이다. 화목이든 통합이든 자주 실패하는 까닭은 이해하는 일이 몹시 어렵기 때문이다. 그 실패의 원인은 나에게 있다. 나의 속은 내 과거와 미래, 욕심과 계획들이 엉켜 있어 남의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고, 왜곡되거나 튕겨 나가 버린다. ‘남의 말을 듣는다’고 하지만 실은 내 방식대로 이해하는 데 불과하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내 식대로 ‘오해한다’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말하기’에 나서기 때문에 각종 분란이 발생한다.

이해의 방법은 무엇인가? 현인들은 ‘경청’을 권한다. 귀를 기울여(傾)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듣기(聽)가 경청이다. 건성으로 듣는 것은 경청이 아니고, 내 식대로 말하는 것은 대화가 아니다. 겉은 대화 같지만 실은 독백이 오갈 뿐이다. 독백은 단절이자 고독이요, 경쟁과 증오를 낳는다. 경청만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길이요, 그 길만이 통합을 이루는 방법이다. 이 길 밖에는 없다.

우리 역사를 놓고 보면 삼국통일 초기만큼 통합이 절실했던 때가 없을 것이다. 겉으로는 삼국이 하나로 묶였지만 오랜 전쟁으로 원한이 뼈에 사무쳤다. 앵돌아진 백제와 고구려 사람들의 마음은 감언이설이나 이익 분배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 통일을 성취한 문무왕이 사후 동해에 시신을 수장하도록 유언할 만큼 왜구의 침탈도 심각했다.

이즈음 나온 설화가 만파식적이다. <삼국사기>는 전하기를, ‘동해에 작은 산이 나타났는데, 거기 한 줄기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갈라져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되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베어다가 피리(笛)를 만들어 이름을 만파식(萬波息)이라고 하였다.’ 또 <삼국유사>는 용이 나타나 왕에게 아뢰기를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만파식적 설화는 극심한 내우외환 위기에서 비롯된 절실한 정치 담론이다. 만파식적의 만파는 ‘수많은 파도’, 즉 안팎의 극심한 혼란을 뜻하고, 식적은 ‘갈등을 치유하는 피리’이니 평화를 간구함이다. 내부 갈등과 외부 혼란을 잠재울 도구가 피리라는 점에 주목해야 하리라. 피리는 깊숙이 숨을 불어넣어야 소리가 나고, 귀를 기울일 때만 들리는 연약한 악기다. 권력과 폭력으로는 더 이상 지배할 수 없고, 상대방의 귀(마음)를 얻지 않고서는 화합할 수 없다는 신라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설화다. 지금 우리에게도 만파식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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