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태의 요가로 세상 보기] 56. 인내심·지구력을 키워 주는, 차투랑가 단다 아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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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직립보행을 하게 되면서 사지(四肢)에 고르게 나누어 실리던 무게 중심이 두 발에 불안정하게 쏠리면서 숱한 근골격계 질환을 앓게 되었다. 차투랑가 단다 아사나는 이를 극복하는 좋은 운동법이다. 시연 박미희. 인간은 직립보행을 하게 되면서 사지(四肢)에 고르게 나누어 실리던 무게 중심이 두 발에 불안정하게 쏠리면서 숱한 근골격계 질환을 앓게 되었다. 차투랑가 단다 아사나는 이를 극복하는 좋은 운동법이다. 시연 박미희.

컴퓨터 공학의 발전에 엄청난 공을 세웠다고 하는 서양장기 ‘체스’는 6세기나 그 이전에 인도의 굽타 왕조에서 특히 유행했던 장기 형식 게임인 ‘차투랑가(chaturanga)’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요가 자세에도 ‘차투랑가 단다 아사나’가 있다. 웨이트 트레이닝에서는 ‘플랭크’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체중을 손바닥과 발가락만으로 지탱하며, 몸은 막대기처럼 꼿꼿한 상태로 납작하게 엎드린 자세를 말한다. 팔다리를 막대기처럼 견고하게 만든다는 의미도 있다. 푸시업 자세에서 내려간 자세와 유사하다.

팔과 손목을 강하게 해주고, 복부기관을 수축시키며 몸 전체에 활기를 부여하는 자세이다. 특히 복부에 강한 자극으로 복근 강화 효과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즐겨 하는 운동이다. 그러나 근력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힘들게 느껴지는 자세이기도 하다. 그래서 때로는 무릎을 바닥에 대고 할 수도 있다.

인간은 직립보행을 하게 되면서 사지(四肢)에 고르게 나누어 실리던 무게중심이 두 발에 불안정하게 쏠리면서 숱한 근골격계 질환을 앓게 되었는데, 이를 극복하는 좋은 운동법이다.

‘차투랑가 단다 아사나(chaturanga danda asana)’는 두 손 두 발만으로 버티는 자세라 하여, ‘사지(四肢) 지지 자세’, ‘엎드려 두 손 두 발로 막대기처럼 버티는 자세’, ‘네 부분의 신체로 버티는 자세’ 등으로 번역된다. 범어로 차투르(chatur)는 4를 말하고 앙가(anga)는 가지·줄기, 단다(danda)는 막대기·널빤지를 의미한다.

성서에서 넷이라는 의미는 ‘기다린다’는 뜻으로도 해석되고 있다. 그러므로 ‘차투랑가 단다 아사나’는 기다림과 인내를 통해 고통과 힘든 시간을 이겨내는 의지를 키우는 자세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숫자 ‘4’가 등장한다. 숫자는 우리가 사는 세상 어디에나 존재한다. 바로 서 있거나 뒤집혀 있거나 크거나 작거나 모양도 가지각색인 채로, 언어는 달라도 세계 어느 곳에서나 숫자의 의미는 통한다. 숫자가 또 다른 세계 공통어인 셈이다.

수의 개념은 원시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원시인들이 사냥감을 잡으면서 수의 개념을 만든 것이 최초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벽이나 지면·판자 등에 필요한 수만큼 줄을 긋는 방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쐐기 문자, 이집트의 그림 문자, 중국의 뜻글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재 쓰고 있는 아라비아 숫자는 이름만 보면 아라비아 사람들이 만든 것 같다. 하지만 아랍인의 발명품이 아니다. 원래 인도에서 유래한 것을 아랍인들이 스페인을 거쳐 유럽으로 전하면서 아라비아 숫자로 불리게 됐다. 2세기경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에 기원을 두고 있다.

지금부터 약 1400년 전 인도에서는 1에서 9까지의 9개 숫자 외에 0이라는 새로운 숫자를 만들어 그들의 수를 나타냈다. 그 당시 아라비아인들은 중국이나 인도에 가서 무역을 했는데, 여러 물건과 함께 인도로부터 여러 가지 숫자를 배워 왔던 것이다.

아라비아 숫자는 로마 숫자와 비교할 때 그 가치가 대단하다. 일례로 로마 숫자로는 불가능한 계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획기적인 변화는 불을 발견하고 바퀴를 발명한 것에 버금가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철학자의 수만큼 다양한 고대 그리스 철학 이론 중에서 피타고라스는 세상의 모든 애매모호함을 숫자(digit)로 표현할 수 있음을 발견하고 “만물의 근원은 수(數·number)이다”라는 수학적 우주론을 설파했다.

“현대에 이르러 피타고라스의 발견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태생부터 고유한 숫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고유진동수가 바로 그것이다. 상대를 읽고, 나를 표현하는 데 한계를 갖는 인간의 불편함을 해소해 줄 디지털 기술들이 경쟁적으로 탄생하고 있다. 미래 준비의 시작은 이 디지털의 이해부터라고 할 수 있다.”(이순석)

우리가 일상으로 사용하는 모든 것들에는 수학이 숨어 있지만 우리는 그저 대범한 척 지나친다. 일일이 그 비밀을 알아야 할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이다. 심지어 음악의 원리 역시 수로 이루어져 있고, 그 원리가 있기에 아름다운 선율이 나오게 되었다.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숫자를 가지고 있다. 숫자가 없으면 무엇 하나 이해하거나 생각할 수 없다.” 기원전 5세기 철학자이며 수학자인 필를라오스의 말이다.

심리학자 칼융은 “자기가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영향을 받은 집단의 무의식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집단적 무의식 속에서 일상생활에 가장 영향을 주는 것은 수(數)다”라고 하였다.

고대 인도에서 수(數)는 브라흐마(Brahma)적인 것, 다시 말해 신성(神性)에 가까운 것이었다. 실제로 고대 인도의 어떤 경전에서는 수가 경배의 대상이 되어 있다.

수에 대해 갖는 이러한 감사들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면면히 이어져 왔다. 그리하여 열 개의 손가락, 네 차례 변하는 달의 위상, 그리고 일 년 열두 달로 환원될 수 있는 일견 엄정한 듯한 우리의 수 체계에도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신비스런 의미가 남아 있다.

중세는 물론이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대표적인 종교들조차 특정한 수가 갖는 종교적 의미와 신비적인 성격을 인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수는 저마다 가진 ‘힘의 장(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숫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사람마다 숫자에도 호불호(好不好)가 있게 마련이다. 행운의 숫자가 있는 반면, 이질감이나 불길하게 느끼는 숫자가 있다.

숫자 ‘4’는 기피하는 숫자의 대명사다. 중국인들은 숫자 4를 지독하게 싫어해 어느 지방 차량번호에는 4가 없다. 홍콩에는 4가 들어간 층이 없는 건물이 많다. 우리 생활 속에서도 4는 불길한 숫자로 여겨지고 있다. 엘리베이터에서도 4는 불길한 숫자로 여겨서 층 표시가 4 대신 F로 표시되거나 아예 4를 건너뛰고 5로 표기된 경우도 있다. 공식적으로도 4자 사용을 꺼리는 습관과 관습도 생겼다. 부지불식간에 4는 한자 죽을 사(死)와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나쁜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4는 과연 나쁜 숫자인가? 그렇지 않다.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은 4라는 숫자를 좋아했다. 4를 죽음의 숫자로 여긴 적이 없다. 길(吉)한 숫자, 행운의 숫자, 성스러운 숫자로 여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4는 인간의 일과 생활에 관련된 곳에 많이 사용했다. 방향을 나타내는 동서남북과 계절을 표시하는 봄·여름·가을·겨울도 모두 넷으로 구성돼 있다. 인간으로서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을 일컫는 4대성인(四大聖人), 팔과 다리를 일컫는 사지(四肢), 매란국죽(梅蘭菊竹)의 사군자(四君子), 관혼상제의 사례(四禮), 문방사우(文房四友), 사상의학(四象醫學) 등 자신을 중심으로 네 기둥이 있어 중심이 온전해질 수 있는 수로 생각했다.

고구려 벽화에 나타나는 청룡·백호·주작·현무의 사신도(四神圖), 태극기의 4괘인 건(乾)·곤(坤)·감(坎)·리(離)가 있고, 대학·중용·논어·맹자의 사서(四書)도 있다. 조선시대 왕조 역사를 객관적으로 기록한 왕조실록을 보면 하나만 만든 것이 아니라 네 길을 만들어서 정족산·태백산·오대산·적상산의 네 곳에 보관한 사실에서도 우리 민족이 4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 수 있다.

한의학에서는 인삼·백출·백복령·감초를 재료로 하여 기(氣)를 보하는 명약인 사군자탕(四君子湯), 당귀·천궁·백작약·숙지황의 네 가지로 혈(血)을 보하는 명약인 사물탕(四物湯) 등에도 쓰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 일정한 경지 이상에 도달한 사람을 가리켜 4대가(四大家)라 불렀다. 이는 4라는 숫자가 인간의 삶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어디에도 친척이 없는 것을 사고무친(四顧無親),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교과서인 사자소학(四字小學), 고사성어인 사자성어(四字成語), 맹자께서 말씀하신 4단(四端) 등의 예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사주(四柱)란 사성(四星)이라고도 하는데 사람의 운명을 떠받치고 있는 네 개의 기둥이다. 글자 그대로 생년(生年)·월(月)·일(日)·시(時)를 말한다.

그럼 우리나라 외에 세계 각국에서는 4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학파에서는 처음 4개의 수인 1·2·3·4를 더하면 완전한 수인 10이 된다 해서 4를 신의 계시인 신성한 수로 생각했다. 그들에게 4는 사물의 근본이나 중심이 되는 중요한 수였다. 세상이 점·선·면·입체의 4가지로 구성돼 있다거나 물·불·흙·공기의 4원소로 이루어졌다고 본 것은 4를 가장 조화로운 숫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4와 관련된 것이 가장 균형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11세기 클뤼니 교단의 성직자였던 로돌프스 글라버는 “4를 통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아래 세계와 앞으로 다가올 저 위의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며 숫자 4를 찬미했다.

앞서 언급한 바 있는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칼 구스타프 융 역시 4와 관련된 숫자의 비밀을 중심 화두로 삼았다. 꿈에서 나타난 4의 숫자를 무의식의 표출로 보았다. 가톨릭 신자인 빅터 화이트는 ‘영혼과 질서(soul and psyche)’에서 “프로이트가 ‘섹스’로 해결한 것을 융은 ‘4’로 해결했다”라고 지적했다. 즉 융은 자신의 심리적 토대를 ‘4’에 두었던 것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사해(四海)의 나라’ 또는 ‘사해(四海)의 지배자’라고 생각했다. 사해는 세계를 의미하며, 4는 동서남북 모든 방향으로 통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결국 ‘4는 죽음’이라는 생각은 우리가 한자를 쓰면서 나쁜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들어온 스포츠인 야구 경기의 4는 아주 중요한 타자의 자리이다. 또한 볼 4개를 얻으면 1루에 진출할 권리가 획득된다. 내야수는 1루수·2루수·3루수·유격수 4명으로 구성된다. 야구에서 한 타석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많은 점수는 4점이며, 타자가 만루 홈런을 쳤을 때 얻을 수 있다.

농구선수 등번호는 4번부터 시작하는데 보통 4번을 단 사람이 주장이다. 축구 경기장부터 체스 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기도 사각의 틀을 기본으로 삼는다.

네잎 클로버는 행운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4는 안정적인 숫자다. 자동차 바퀴가 4개인 것만 보아도.

‘싱글 레이디(single ladies)’, ‘크레이지 인 러브(crazy in love)’ 곡으로 유명한 미국의 알앤비 가수 비욘세 놀스의 음반 ‘4’(2011년 6월 발매)는 네 번째 정규음반으로서 앨범의 제목인 ‘4’의 의미는 비욘세의 행운의 숫자이면서, 팬들의 요청을 수용한 것이라고 한다. 발매 첫해 빌보드 200에서 1위로 데뷔했다.

특수 상대성 이론을 이야기할 때 항상 들어온 말이 4차원이다. 보통 알려진 대로 1차원은 선, 2차원은 평면, 3차원은 보통 우리가 사는 공간이다. 우리가 사는 3차원의 공간의 점을 표시하는 세 개의 숫자 이외에 여기에 시간을 더 첨가하여 네 가지 숫자가 필요하다는 의미에서의 4차원이다.

바이올린·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 또는 바이올린1·바이올린2·비올라·첼로의 합주를 현악 4중주라고 한다. 첼로·비올라·우쿨렐레의 현은 네 줄이다.

4라는 숫자는 지상 세계의 완전성을 표시하는 숫자였다. 4는 십자가에 바탕한 세속적 질서, 즉 지상의 질서를 주로 나타냈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의 이름 야훼(YHWA)는 네 글자(Tetra gramaton)라는 말로 대치되는 용어가 되었고, 낙원의 네 줄기 강은 4대 복음서의 예시이며, 복음사가의 상징물이 된 에제키엘서의 네 동물, 4대 예언자, 4대 교회박사, 4대 천사 등도 4와 관련된다.

동서남북의 그리스어 첫 글자를 따서 아담(adam)을 표시하였다고 한다.

영어에서는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을 가리켜 스퀘어 맨(square man)이라는 표현을 쓴다. 니체 역시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형은 몸과 마음이 반듯한 사람이라 했다.

4와 4방위의 관계는 신(神)의 형상으로도 표현된다. 브라흐마 신은 네 개의 머리로 4방위를 상징한다. 시바신은 네 개의 팔로 춤추면서 세상을 파괴하고 다시 창조한다. 힌두교에서는 하늘의 소가 네 개의 젖통으로 네 개의 젖줄을 유출한다고 말한다.

부처는 속세에 얽매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인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四聖諦)를 가르쳤다.

경전을 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의 네 권으로 묶는 것은 기독교 전통에서만 한정되지 않는다. 인도인들도 네 권의 리그·사마·야주르·아타르바 베다를 보유하고 있다. 이슬람교에서도 네 권의 성전 율법, 성가, 복음 코란이 있다.

초기 이슬람시대에는 네 명의 정의로운 칼리프(마호메트의 후계자)라는 칭호가 지배했다. 수피교도 4의 질서를 중시했다. 이들은 인간의 발전 과정을 네 단계로 구분했다.

원래 이집트에서 만들어졌지만 시간이 지나 카발라에 동화된 카드놀이인 타로트(22장이 한 벌인 트럼프)의 네 가지 색깔도 실은 우주의 네 부분에 맞춘 것이다. 타로트 카드의 네 가지 색깔인 흑·백·적·녹색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카드에서도 주를 이루고 있다.

인간의 삶을 학습기(學習期)·가주기(家住期)·임서기(林棲期)·유행기(流行期)의 네 단계로 구분하고 무소유의 금욕주의자가 되는 마지막 단계에서 절정을 이루는 인도의 가르침도 있다.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도 4의 질서와 관계가 있다. 카스트는 원래 색깔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인 바르나(varna)에서 비롯된 말로, 브라만·크샤트리아·바이샤·수드라로 이루어진 세습적 신분 및 계층이다.

세계문명의 발상지도 인도의 인더스강 등 4곳으로 분류한다. 지구의 모양을 정방형으로 상상했던 것처럼, 세계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도시 역시 정방형으로 구획되었다. 도시를 정방형으로 건설한 것은 아주 오래전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도 북서부 인더스강 계곡에 위치했던 모헨조다로는 이미 기원전 3000년경에 완벽한 정방형 꼴의 도시로 구획되고 건설되었다.

로마는 그 모양 때문에 예전에는 로마 쿠아드라타(quadrata)로 불리었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쿠아드라타는 주택이나 정방형으로 구획된 주거공간의 상징으로 되었다.

특정한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왠지 4라는 숫자는 기분 나쁘다는 문자 관습상에 의하여 만들어진 이러한 숫자 개념은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별로도 독특한 의미를 가진 싫어하는 숫자들이 존재한다. 전술했듯이 중국인들은 4의 발음이 죽을 사(死)와 비슷하다 하여 4라는 숫자를 매우 기피한다. 일본 사람들은 4와 괴로울 고(苦)와 발음이 같은 9를, 이탈리아인들은 죽는다는 의미의 17을, 미국은 예수님이 승천한 날 13일의 금요일이라는 이유로 13을, 베트남은 8을 싫어하는데 이유는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라 무조건 싫어한다나.

반면에 인도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숫자는 9다. 부(富)의 여신 락슈미와 관련된 숫자이며, 신(神)의 표상인 수 3의 제곱이며 한 자리로 적을 수 있는 가장 큰 수 등의 이유다. 그래서 고대부터 9는 창조의 신 브라흐마의 수라고 여겼다. 9가지 보석을 이용한 보석요법도 숭상되었던 적이 있다. 그런 연유로 VIP번호판 9999는 거래액이 상상을 뛰어넘었다고 할 정도다.

알고 보면 이렇듯 ‘4’만큼 매력적인 숫자도 없는 듯하다. 수학자의 숫자이기도 하고, 예술가·이론가·철학자·신비가·종교가의 숫자이기도 하지 않는가.

이제 그만 숫자 ‘4’의 잘못된 편견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을까? 4를 종합하여 표현한다면 풍요와 완성이고 완전이며 전체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인내까지 더하여진다. 사각형은 땅을 나타내며 동서남북을 가리킨다. 그리고 온 세상을 말한다. 또한 연극 스테이지를 연상하기도 한다. 이 스테이지는 어쩜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인생의 무대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삶과 죽음을 연기해야 하고 남을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인 수오지심(羞惡之心), 겸손하여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인 사양지심(辭讓之心), 잘잘못을 분별하여 가리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의 사단(四端)과 기쁨·노여움·슬픔·두려움·사랑·미움·욕망인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의 일곱 가지 인간의 자연적 감정인 칠정(七情)을 연기해야 한다.

우리는 어쩜 지구별에 떨어져, 각자에게 맡겨진 역할연기를 하는 연극배우일지도 모른다.

사방으로 툭 터져 아무 장애가 없는 것을 사통팔달(四通八達)이라고 한다. 우리의 매일매일이 이렇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그래도 창밖을 보라. 만화방창(萬化方暢)의 봄이다. 비발디의 4계(季) 중 봄의 소리 왈츠 곡이라도 들어보시라. 만물이 용솟음치며 약동하는 이 봄날 우리에게도 희망찬 미래의 시간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음을 느껴보시라.

목련꽃 살구꽃 복사꽃 앵두꽃 벚꽃의 꽃망울이 줄줄이 툭툭 터지는 소리도 들어보시라. 얼마 후 눈앞에 펼쳐질 무릉도원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 절로 감사의 기도가 나올 법도 한 계절이다.

우리는 힘들고 고단했던 시간들을 묵묵히 인내하고 견디면서 예까지 왔다. 때론 삶의 무게에 눌려서 비틀거리기도 하면서, 그냥 풀썩 주저앉고 싶었던 순간에도 자신을 추스르며 그래도 이만큼 고만고만하게 잘 살아오고 있지 않은가? 자신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간 움츠리고 있었던 가슴을 활짝 열어보자. 오늘은 그렇게 수고한 나에게 뿅뿅 하트라도 한 다발 날려주는 게 어떠할지? 지난(至難)한 시간들 잘 버티고 이겨 내주어 고맙다는 말과 함께 나를 위로하고, 나를 격려하고, 나를 칭찬해주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잘 견디고 잘 이겨내며 잘 헤쳐 나가길 기원하는 마음도 담아서.

이렇듯이 때론 고단함과 힘든 시간에 맞서 참고 기다리는 인내력을 키워주는 ‘차투랑가 단다 아사나’ 수련 중에 문득 떠오른, “현재의 견딤은 미래의 효용을 결정한다”는 격려의 말귀를 가슴속에 고이 새겨본다.

(*위의 본문 내용들 중에는 각종 블로그 등 인터넷 매체 등에서 참조·인용한 부분도 다수 포함되어 있음.)


[ '4(四)' / 최진태 ]

4라는 숫자라고 까닭없이 혐오기피/ 마음에 달려있네 편견일랑 깨부수리/ 행운의 네잎클로버 역발상의 아이콘


[ 수(數 numbers) / 최진태 ]

우리 일상 모든 것에 수학이 숨어있군/ 현대의 모든 문명 이 숫자 덕분이라/ 역시나 만물의 근원 수(數)라는걸 실감한다

디지털 이해없인 생활자체 안된다네/ 현대의 원시인류 소리듣기 시간문제/ 아날로그 위한 배려도 해줌직도 하다만


[ 차투랑가 단다 아사나 / 최진태 ]

사지(四肢)란 두 손 두 발 지칭한 말이라네/ 네 발에서 두 발 보행 바뀐 것을 진화란다/ 얻는 것도 많았지마는 잃는 것도 많았군

근골격계 숱한 질환 숙명인냥 따라왔다/ 원래의 모습대로 몸의 형상 취하는게/ 건강을 유지하는 길 그것만이 최상책

몸 거꾸로 뒤집는 동작 최고의 명약이고/ 차투랑가 단다사나 이 역시 멋지다오/ 힘들고 고달프지만 즐기면서 하소서

견디고 버티면서 사는게 우리네 삶/ 이 동작 취하면서 인내심도 배양하고/ 지구력도 함께 키워서 헤쳐가세 풍진(風塵)세상


최진태 부산요가지도자교육센터(부산요가명상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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