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소총 K2의 뿌리, 총통을 만든 조선의 장인들 [자주국방인in人] 11
고총통에서부터 승자총통까지 다양한 총통류를 전시한 국립진주박물관 전시실. 이재희 기자
[자주국방인in人] 11. 조선을 소화기 전문 국가로 만든 기술자와 성과물
남원의 장인 희손 씨 , 하동에 살았던 장인 막금 그리고 준금, 이물금, 천중원, 규가, 김영환, 김우경, 신산, 여창, 개복, 강룡, 김연, 한오미, 석가노….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일을 한 조상들의 이름이다. 그러나 이들의 이름은 역사서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들은 관노이거나, 기껏해야 평민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양반도 아닌 이들이 역사서에 이름이 기록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들의 이름은 지금, 전국에 있는 여러 박물관에서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것도 종이 책자가 아닌 청동 유물에 깊게 새겨져 있다.
승자총통, 소승자총통, 천자총통, 지자총통 등 화약 무기를 이들이 만들었으니까. 왜 당시 지배계층은 구리 만지는 하잘것없는 장인의 이름을 그 중한 화약 무기에 새겼을까.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크게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이들의 빛난 공적으로 인해 살아남았다. 고려와 조선을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지켜내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위인이 이들이다. 아 막금 님이여, 희손 님이여.
현존하는 최고의 승자총통에 새긴 명문. 1579년 장인 규가가 만들었다.
이름 없는 기술자가 조선을 지켰다
‘1583년(선조 16년) 만력 계미년 9월에 김해의 장인 개복이 만들었다. 무게는 4근 13량이다. 같은 해 김해의 장인 강룡이 만들었다. 무게는 5근 8량이다.’ 부산대박물관에 있는 두 개의 승자총통에 각각 새겨진 명문이다. 두 점 모두 크기와 형태, 죽절 수는 같으나 무게는 다르다.
국립진주박물관에 있는 지자총통(地字銃筒)은 1557년(명종 12) 3월 김해부의 도회에서 장인 김연이 주조했다. 보물 제 863호인 동아대박물관에 있는 지자총통 역시 김연이 1557년 4월 만들었다. 보물 제862호인 육군박물관 소장의 지자총통은 이보다 한 달 뒤에 같은 지역인 경상도 김해에서 김연이 만들었다. 김연은 총통 제작 능력이 뛰어난 김해 지역 장인이었다.
하동에서 출토된 승자총통에 이름이 적힌 막금의 이름은 서울 청진동에서 출토된 총통에서도 이름이 적혀 있다. 남원 출신 장인 희손은 16세기 후반인 1587년 7월 소승자총통을 만들었고, 1592년 3월 별승자총통에서도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준금은 별양자총통과 소양자총통에 번갈아 이름이 등장한다. 1583년 이물금 장인은 승자총통을 제작했다.
총통에 만든 장인의 이름을 새긴 것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관리 차원'이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일본이나 서양과 달리 우리는 무기류를 관영 공방에서 만들었다. 당시 일급 기밀이라 할 수 있는 화약 무기 제작의 기술이나, 이들이 만든 총통이 외적이나 적대 세력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 이름을 새기는 행위로 이어졌다. 또 구하기 어려운 청동 재료가 사사로이 쓰이거나 유출되는 것도 막을 의도였다. 하지만, 볼모가 되었던 이들의 이름은 지금 길이 남아 우리를 자랑스럽게 한다. 그들의 이름은 청동에 아로새겨져 자주국방의 염원으로 영원히 빛날 것이다.
2번 총통이 세종 때 만든 세총통. 길이가 짧아 기병용으로 쓰였는데 최초의 권총으로도 불린다.
세총통, 세계 최초의 기병용 권총
세종은 한글을 창제한 위대한 조선의 왕이었다. 세종이 화약 무기 개발에 매진했다는 이야기는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실상 세종은 4군 6진 개척 이후 여진족과 끊임없는 갈등을 겪으며 누구보다도 화약 무기를 갈구한 왕이었다.
이러한 세종의 집념은 마침내 세계 최초의 권총으로 불리는 기병용 세총통을 만들어낸다. 세총통은 사거리가 200보로 지금 거리로 환산하면 250m 떨어진 적도 공격할 수 있다. 길이가 아주 짧아 철흠자라는 집게에 끼워서 쐈다. 세총통을 보고 당시 사람들은 여자와 어린아이도 능히 다룰 수 있는 무기로 극찬했다.
1444년 세종은 군기감에 명령을 내렸다. ‘대대적으로 화포를 개량하라.’ 이 시기 일발다전법이 활성화됐다. 한 번 발사에 여러 발의 화살을 쏠 수 있는 사전총통이 개발됐다. 화약의 폭발력을 화살에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사용한 격목은 화살을 사정거리를 늘렸다. 1447년 세종은 총통위를 편성했다. 화약을 생산하고 관리하는 사표국도 만들었다. 당시 일본과 여진은 화약 무기가 없었다. 초기 조선은 화약 무기로 국방력을 강화한 자주국방 강국이었다.
세종 때 편찬한 ‘총통등록’은 특급 군사기밀이라 그런지 후대에 책이 전하지 않는다. 다른 문헌을 통해 총통등록이 전략무기 제조법 매뉴얼을 정한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세종 시절 조선은 강력한 화약 무기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국립진주박물관 김명훈 연구사가 소승자총통을 직접 그리며 설명하고 있다.
조선은 동북아 화약 무기 강국
우리나라 14개 국립박물관 가운데 임진왜란 특화 박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관장 장상훈)은 2018년부터 선조들이 만든 화약 무기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2019년 그 결과물로 ‘소형화약무기’라는 연구서를 발간했고, 이를 근거로 2021~2022년 3월까지 조선시대 화약 무기를 다룬 ‘화력조선’ 기획 전시를 마쳤다. 이 과정에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총통류 296점을 전수 조사했다.
총통은 고대 무기라면 연상하는 칼, 창, 활 등과 달리 다소 생소하다. 그러나 이번 조사연구에 따르면 여말선초에 폭발적으로 발달한 화약 무기는 실제 조선의 주력 무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주요 전투에서 고려와 조선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화약 무기’ 덕분이라는 것이다.
국립진주박물관 ‘화력조선 시즌2’ 전시 기획 시리즈에 참여한 김명훈 학예연구사는 “1467년 도총사 이준은 총통 등 화약 무기로 이시애의 난을 진압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장양공은 이순신 장군의 우화열장(右火烈將, 총통수를 이끄는 장수)으로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렇듯 조선 시대 주요 전투에 화약 무기는 주력 무기로 등장합니다”고 말했다.
전쟁사연구 전문가인 박제광 건국대박물관 학예실장도 “고려말 진포해전에서 최무선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막 개발한 강력한 화약 무기 덕분이었다”며 “조선 초에 이르러 화약 무기는 체계를 갖추면서 각종 전투에서 필승 무기로 발돋움했다”고 말했다.
승자총통에 선명하게 드러난 대나무 마디 형태 죽절.
대나무를 닮은 총통 죽절의 비밀
고려 고총통부터 조선 승자총통까지 크고 작은 총통에는 대부분 죽절이 있다. 죽절은 대나무의 마디 형상과 똑 닮았다. 죽절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병기도설’에서 총통의 규격을 이야기할 때 죽절 개수가 중요한 특징이었다.
병기도설은 조선 성종 때 편찬한 한국의 대표적인 예법에 관한 책인 국조오례의서례에 나오는 병기 관련 별책으로 각종 무기와 갑옷의 규격과 형태를 상세하게 그림과 글로 기록했다.
김 연구사는 “죽절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명확하게 기록한 문헌은 없다. 죽절이 존재하면 표면적의 차이가 발생하지만 과학적으로 냉각속도에 있어서, 죽절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유의미한 차이는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죽절은 총열의 두께가 죽절 부분에서 두꺼워지기 때문에 죽절이 많은 것은 총통의 강도 강화에 도움이 됐을 것으론 보인다.
“국조오례의 병기도설에 총통의 격목부가 그림으로 설명돼 있습니다. 진주박물관에서 CT 등 현대 첨단장비를 동원해 확인한 결과 총통 내부에 별도의 사다리꼴 격목부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김 연구사는 아직 우리 총통에 관하여 밝혀야 할 신비가 많다고 했다.
총통의 죽절은 승자총통 후기 모델에서는 점차 사라진다. 죽절을 넣지 않으면 주조가 훨씬 쉽기에 변화한 것으로 추측한다. “외형이 단순해지면 제조가 더 쉽습니다. 승자총통의 발전 모델인 소승자총통은 죽절이 없습니다. 그런데 승자총통류 이후 총통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조총에 밀려 쇠퇴했습니다. 죽절이 사라지면서 소형 총통의 시대도 끝이 나는 것입니다.” 김 연구사가 설명한 죽절과 관련한 이야기다.
현대에 와서 재현한 사전총통기화거. 50개의 사전총통이 장착돼 한 번에 200발의 화살을 쏠 수 있다.
기관총, 클레이모어를 닮은 총통
총통은 기본적으로 화살 발사체였다. 화약을 장착한 후 총구에 화살을 집어넣어 발사하는 형태다. 조선 세종 대에 이르러 화약 생산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했다. 화약의 위력이 세지자 하나의 총통으로 많은 화살을 발사하는 기술이 개발됐다.
신기전을 장착한 화거를 만들고, 격목을 사용해 폭발력을 그대로 전달하는 일발다전법이 탄생한다. 2개의 발사체를 쏘는 쌍전화포와 4개의 발사체를 쏘는 사전총통, 8개의 화살을 쏘는 팔전총통 등이 일발다전법을 실현하는 무기다.
이런 총통들은 기본적으로 혼자서는 운용할 수 없는 무기였다. 현대의 초기 기관총을 2인 이상이 운용했던 것처럼 말이다. “사전총통 등은 병사 혼자서 운용하기는 힘들었습니다. 한 발에 4발의 화살이 발사되니 화살만 하더라도 별도의 보관 병사가 있어야 했습니다.” 박 학예실장은 총통군은 현재의 보병 같은 형태가 아니라 여러 명으로 구성한 복합군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 번에 12발의 화살을 발사할 수는 있지만 10회를 쏘면 120발의 화살이 필요한 것이다.
신기전을 쏘는 화거도 다연발이어서 현대의 클레이모어 같은 조선의 다연발 발사체가 사전총통기화거라고 김 연구사가 설명했다. “세종이 대리청정하던 조선 문종 때인 1451년 중신기전 100개를 쏠 수 있는 ‘신기전기화거’를 새로 만듭니다. 또 사전총통 50정을 장착한 사전총통기화거도 새로 만들었습니다.” 김 연구사는 화거는 지금의 클레이모어를 능가하는 대화력 무기로 다연발 로켓으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사전총통 50정을 동시에 발사하면 한 번에 200발을 화살을 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전투에서 민첩하게 사용하는 소형 화기의 필요성도 있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화살 발사체는 깃 등의 존재로 정확도는 있었죠. 이후 발생한 철환이 편리하기는 한데 산탄총처럼 펴져 나가니 위력이 약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다 보니 총신이 길어지고 총구는 좁아지는 형태로도 발전했습니다. 총통은 실전에서 사용을 거듭하면서 발전하게 됩니다.” 박 학예실장이 설명했다.
조선후기 십연자총. 화거 등에 장착에 쏘면 기관총처럼 연속 발사할 수 있다.
을묘왜변, 소형 총통 분기점
고려 고총통의 위세를 이어받아 세종 때 최초의 권총이라 할 수 있는 세총통이 개발되고, 다연발 화약 무기인 사전총통과 팔전총통이 탄생한다. 총통은 개발하면서 이름을 붙이는데 세종 대 이총통은 특이하게 단면이 삼각형이다. 그 이후 탄생한 삼총통은 단면이 원형이다. 삼총통은 현존 유물이 다른 총통에 비해 많다고 한다. 대량 생산해 주력으로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총통은 1467년 세조 때 발생한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주력 무기로 쓰였다. 함길도에 주둔한 이시애 군은 변방의 화약 무기로 반란을 일으켰고, 세조는 진압 사령관 이준에게 총통 250정, 화거 5대, 화전 400개, 삼총통용 화살 5000개, 격목 5000개 등을 지급했다. 막대한 화력으로 반란군을 밀어붙인 이준은 조선 최초의 대규모 화약 무기 전쟁인 만령전투에서 마침내 승리했다.
세조는 세종 대에 비해 비약적으로 가볍고 길이가 짧아진 새로운 소화기 신제총통을 만들었다. 실측 길이는 20cm다. 그 시기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복전총통도 길이가 22cm에 불과하다.
이후 성종 때 육총통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물은 전하지 않는다. 성종 때 가장 주목하는 것은 현대의 대포인 대형 총통에 천자문 순서대로 이름을 붙이는 관리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이 이렇게 이름을 얻게 된다.
조선 명종 10년인 1555년 발생한 조선 최대 규모 왜구 침범 사건인 을묘왜변은 소형 화약 무기의 획기적 발전을 가져온다. 아이러니하게도 왜구가 탄환을 사용하는 첨단 화약 무기를 사용한 것이다.
“아마도 당시 왜구, 즉 해적은 일본인만이 아니라 동남아인도 있었을 것입니다. 포르투갈에서 일본에 조총이 전래하는 과정에 말라카해협을 지나야 하니 인근 국가에 조총을 전했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기록에는 왜구가 쏜 탄환이 참나무 방패를 뚫고 아군을 즉사시켰다고 해 놓았으니까요.” 김 연구사는 을묘왜변 이후 위기를 느낀 조정은 한양 대문의 종을 녹여 새로운 총통을 만들고 명나라에서 불랑기포(유럽식 소형 화포)를 들여와 군기시에서 생산했다고 설명했다.
총통에 쓰인 탄환과 연환.
승자총통, 마침내 탄환을 담아 쏘다
전라좌수사와 경상병사를 지낸 김지는 기존 총통보다 비거리가 훨씬 길고, 금속 탄환을 사용해 파괴력이 더 강한 승자총통을 만든다. 김지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나, 그가 만든 승자총통이 1583년 여진족 니탕개의 난 등에서 위력을 발휘하자 그 공로로 당시로는 드물게 죽은 뒤 벼슬이 올랐다.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승자총통은 1579년 규가라는 장인이 만든 것으로 보물로 지정돼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승자계 총통의 병부에는 총통을 만든 시기, 장인, 총통명, 무게, 지역, 소모 화약량과 탄환량 등이 명문으로 새겨져 있다.
병부(자루 부분)에 새긴 명문은 특히 장인의 이름이 기록돼 있는데 이는 매우 흥미롭다. 김 연구사는 “우리나라는 일본과 달리 장인을 우대하거나 칭송해 명문을 새긴 것은 아니었다”며 “아마도 첨예한 군사 무기이다 보니 유출을 방지하고, 제작자에게 엄격한 책임을 묻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조선은 화약 무기 관리가 엄격했다. 화약 관련 기술자는 지방으로 파견하지도 않았다. 총통의 주원료인 청동도 귀했다. 무게를 적은 것은 원재료를 관리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만든 승자총통은 집단으로 달려드는 여진족 등을 상대하기 좋은 무기였다. 특히 성을 방어하는 전투에서는 위력을 발휘했다. 산탄 효과가 있으니 달려오는 밀집 대형을 공격하기엔 최적의 무기였다. 개인 휴대도 용이했고, 한 번에 15개 정도의 탄환을 쏘니 그 효과가 대단했을 것이다.
특히 승자총통이 각별한 이유는 또 있다. 기존 총통이 화살을 발사하는 도구였다면, 승자총통은 철환을 쏜 최초의 소형 화약 무기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최영진 전 SNT모티브 연구위원은 우리나라 소통발달사를 연구한 ‘소화기 무기체계’란 논문에서 승자총통을 우리 소총의 효시로 주장했다. 탄환을 사용한 최초의 총기라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다양한 승자총통류. 별양자총통(12)와 소양자총통(13), 소승자총통(15) 등이 전시돼 있다. 맨 아래 총통은 목가를 결합한 소승자총통.
다양하게 진화한 소형 총통
을묘왜변부터 이후 20년간에 해당하는 1570년대부터 임진왜란이 발발하는 1592년까지가 조선 소화기의 폭발적인 발전 시기다. 이때 승자총통은 다양한 형태로 개량되었다. 승자총통은 사거리가 600보(약 720m)로 지금의 소화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무게는 4kg을 상회해서 성인 남자가 휴대하기에도 편했다. 유사시에는 곤봉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강력한 산탄총이니 특히 공성전에서 효과를 발휘했다. 그러나 을묘왜변 이후 패러다임이 바뀌기 시작했다. 조총의 위력을 실감한 조선은 승자총통을 적극적으로 개량한다.
그렇게 탄생한 총통이 별양자총통과 소승자총통이다. 별양자총통은 죽절이 사라지고, 총신이 훨씬 길어졌다. 조준 사격이 가능하도록 가늠쇠가 있는 소승자총통도 만들었다. 소승자총통은 나무틀(목가)에 결합해 사용하는 것이어서 현대의 소총 형태와 많이 닮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적은 신무기 조총으로 조선군을 괴롭혔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전쟁에서 조선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수군의 활약, 육군의 분전, 의병과 명군의 지원도 주요했지만, 강력한 화약 무기가 제 역할을 한 덕분이라고 학자들은 분석하기도 한다.
“진주대첩은 비축한 화약무기 덕분에 적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평양성을 수복할 때도 조명연합군은 강력한 화포를 사용했고, 행주대첩에서 조선군은 10배가 넘는 수적 열세를 딛고 화거 등 대형 화약 무기로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김 연구사는 임진왜란 때 화약 무기의 중요성을 예로 들었다.
이후 정유재란인 1598년 사천왜성 전투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철제 총통도 발굴되었다. 이 총통은 장전된 탄환도 함께 발굴돼 주목받았다. 승자총통을 비롯한 조선의 화약 무기는 서양에서 전래한 무기인 왜군의 조총에 밀린 초기 임진왜란을 결국 마지막에 승리로 일군 또 하나의 일등공신이었다.
조선의 소형 화약 무기를 연구한 진주박물관이 최근 펴낸 <화력조선>의 마지막 장에 '고총통에서 K2소총까지'란 제목의 계통 그림도가 수록돼 있다. SNT모티브에서 일궈낸 최초의 국산소총 K2의 시원은 결국 고총통이었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요산 김정한 선생은 1973년 11월 29일 국방부 조병창 건립 기념 비문에 이렇게 새겼다. '국방은 한 나라의 존립을 보장하는 최대의 요건. 방비를 등한히 해 외적의 침략을 받았던 치욕스러운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 말자. 여기 자주국방을 다짐하는 무기 생산의 터전을 마련했다. 우람한 가동 소리는 조국의 영원한 안전과 자유를 굳건히 보장하리라.' 선생의 말씀을 축약했지만 대한민국 자주국방의 시원이 부산 기장군 철마면 전 국방부 조병창이다. 조병창은 (주)대우정밀로 민영화한 뒤 현재 SNT그룹(회장 최평규)의 SNT모티브로 발돋움했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자주국방의 대의는 면면히 이어진다. 그 거룩한 여정에 묵묵히 복무한 이들을 발굴해 <부산일보>는 ‘자주국방 인in人 시리즈’를 지면과 온라인에 연재한다. 모든 영웅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를 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는다.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