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회색분자의 세상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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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녕 편집국 부국장

‘회색분자’의 의미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소속, 정치적 노선, 사상적 경향 따위가 뚜렷하지 아니한 사람’이라고 한다.

‘회색분자’는 결코 듣기 좋은 말이 아니다. 좋은 말로 ‘중도층’이라고 표현하는 방법도 있지만, 뭔가 뚜렷한 철학이 없고, 우유부단하고, 자기 주장이 분명치 않은 이들을 ‘회색’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 ‘반동분자’ ‘불순분자’에 사용하는 ‘분자’라는 표현을 넣어 죄인된 느낌까지 주니 ‘회색분자’로 불려지는 건 썩 유쾌하지 못하다.

‘회색분자’는 ‘흑백논리’에서 유래된 단어라고 한다. 흑이냐, 백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세상에서 이도저도 아닌, 두 가지 색깔이 섞인 회색지대에 머물고 있는 이들을 ‘회색분자’라고 칭해왔던 것이다.

흑백논리 극명한 현 시대
중도층을 회색분자 취급
신구권력 대립 어불성설
행정가는 나랏일이 우선
헌법상 정치중립 지켜야
중도층, 상식으로 심판할 것



우유부단하고, 철학도 없고, 자기 주장도 못하는 부류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회색분자’가 더 우대받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흑과 백이 너무나 뚜렷한 사회가 됐다. 이 흑과 백의 양 끝단에 자리잡은 이들의 목소리가 이렇게 컸을 때가 있었을까? 살아보지 못했던 1940~50년대 좌우익이 이 땅에서 극렬하게 대립했던 시기가 이러했을까?

중도층을 위하고 중도를 지향한다는 소리는 많지만 정작 중간에 머물러 있는 이들은 존중받는 ‘중도층’이 아니라 ‘회색분자’ 취급받기 일쑤다.

정확하게 반으로 표심이 갈라진 이번 대선이 끝난 지 20일쯤 된다. 표를 갈라간 두 당 모두 자신들에게 표를 찍어준 그 숫자가 마치 온전히 자기 진영의 군사인 양 극한 대치를 하고 있으니 기가 찰 일이다. ‘민심을 겸허하게 받들겠다’는 양측의 소회를 애초부터 믿지 않았지만 ‘중도층’의 고뇌에 찬 선택의 의미를 어떻게 이렇게 노골적으로 왜곡할 수 있을까?

‘신구(新舊) 권력의 극한 대립’이란 뉴스가 연일 보도되고 있다. 여야가 싸운다는 말은 있어도 '신구 권력'이 맞붙어 싸우는 상황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다.

‘신구 권력’이란 단어부터 얼토당토않다. 정치와 행정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은 대학교 신입생들이 배우는 정치학개론이나 행정학개론에 나오는 얘기 아닌가? 신권력이든 구권력이든 정치가 아닌 행정을 하고 있거나 해야 할 주체들이다.

헌법 제7조 2항은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고 있다. 신분을 보장하는 만큼 정치 외압에 휘둘리지 말고 오직 국민만 바라보고 공직생활을 하라는 의미 아닌가? 그런데 현재 공직에 있고 공직을 수행해야 할 이들이 왜 이렇게 여당과 야당처럼 싸우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너무 순진하고 어리석은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마치 회색분자처럼? 헌법은 헌법일뿐, 현실을 직시하고 흑백의 한편에 서서 ‘우리 편 살고 상대 편 죽어라’를 외쳐야 하는 것인가?

우리 현실이 너무 노골적이다. 체면도 없고 상식도 없다.

‘중도층’이 ‘회색분자’처럼 철학도 없고 매사에 주저주저하고 소신도 없는 것 같지만 대부분 건전한 상식과 상대의 형편을 살펴볼 줄 아는 체면이란 게 있다.

현재의 대한민국 뭔가 불안하지 않은가? 먼나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 상태도 불안한데 당장 북한에서 끊이지 않고 무력시위를 하고 있다. 코로나19는 독감과 비슷한지 아닌지도 불명확하다. 코로나19와 공존하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도 모르겠다. 불안감은 여전하고 자영업자들만 죽어난다. 집값은 이미 서민에겐 ‘넘사벽’이고 주식은 올랐다내렸다 하는 사이 역시 서민들만 낭패를 보고 있다.

뭐 하나 명확하게 미래를 밝힐 위안거리가 없는데 행정가의 탈을 쓴 정치인들이 나랏일은 제쳐두고 오직 6월 1일 지방선거만 보고 있는 것 같아 속이 타들어간다.

‘진보’와 ‘보수’로 칭해지는 세력들로 나눠진 세상인 듯 보이지만 ‘회색지대’에 서서 안타까워하는 ‘중도층’들이 더 많다. ‘나는 무조건 옳고 상대는 무조건 틀렸다’고 강요해도 결국 알 건 다 아는 게 중도층이다. 또 이들은 묵묵히 투표장에 나가서 심판을 할 것이다.

신구 권력이 공존하는 시기는 앞으로 길어야 40여 일이다. 정치가 아닌 행정을 하는 이들은 ‘정치적 중립’의 흉내라도 좀 내기 바란다. 극렬한 지지층을 제외한 일반 국민들 앞에 최소한의 체면과 상식은 지켜야 할 것 아닌가?

오늘(28일) 저녁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당선인이 만찬 회동을 한다고 한다. 정치인들의 만남이 아닌 행정가들의 만남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제발~ jumpjump@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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