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독한 정치'의 시대, 김영춘의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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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훈 서울정치팀장

“너무 오래 했잖아, YS(김영삼 전 대통령) 때부터 치면 35년이야, 35년.”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 홀가분함이 묻어났다. 부산 더불어민주당의 간판 격인 전 해양수산부 장관 김영춘의 지난주 정계 은퇴 선언은 갑작스러웠다. 그는 퇴장의 이유로 거대 담론의 시대가 퇴조하고, 생활 정치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변화된 시대에 적합한지 자문했다고 했다. 입빠른 이들이 패배가 뻔한 부산시장 선거 출마에 대한 부담 때문이라고 수근대지만, 적어도 그를 아는 사람들에겐 오랜 고뇌의 시간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결정에 대해 한사코 세대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봐 달라고 했지만 여권 ‘586’ 세대의 맏형 격인 그가 자신의 ‘쓰임새’를 고민하다 스스로 내려오는 모습은 한 시대가 저물어가는 광경으로 다가왔다.

정치판 ‘신사’ 김영춘의 갑작스런 은퇴
10년 이상 ‘부산’이라는 화두와 씨름
남긴 부산 비전, ‘순한 정치’ 기억될 것

김영춘 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6·13 지방선거를 앞둔 2018년 3월 초 해양수산부 장관이던 그는 일군의 기자들과 서울 마포의 한 식당에서 저녁을 같이 했다. 그날은 부산시장 출마 압박을 받던 그가 마침내 출마 결심을 밝히는 자리였다. 그러나 며칠 뒤 그는 “저의 출전을 바라는 분들께 죄송하게 됐다”며 결국 불출마했다. 당시 오거돈 전 장관으로 후보를 정리한 부산 친문(친문재인) 핵심들의 만류가 결정적인 이유였다. 이후 결과는 모두가 아는 대로 오거돈 시장의 불명예 사퇴, 그 멍에를 짊어지고 나선 김영춘의 낙마였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4년 전 초유의 부울경 지방권력 ‘싹쓸이’의 환호가 무색하게 최근 후보 구인난을 겪고 있는 부산 민주당을 보니 그때 그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부산 정치 지형은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보수 본산인 부산에서 민주당 계열의 인사들 거개가 비슷한 간난신고를 겪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2010년 부산행을 택한 김영춘의 고군분투를 지켜본 기자는 좀 애틋한 마음이 있다. 김영춘은 ‘신사’라는 별명대로 사석에서라도 모질게 남을 비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저토록 옳은 소리를 저토록 싸가지 없이 말하는 재주는 어디서 배웠을까?”라는 유시민 씨에 대한 말이 그가 공개적으로 남긴 가장 큰 험구였다. 그런 김영춘의 부산 적응기는 쉽지 않았다. ‘거물급’의 귀향에 환영하던 분위기도 잠시, ‘샤이’하면서도 명분을 따지고, 몇 번을 봐도 좀 데면데면한 그를 두고 “‘아싸리’한 맛이 없다” “저렇게 해서 사람이 따르겠나”는 말이 돌았다. 그도 이런 비판을 잘 안다. 그는 자신의 책 에서 “사실 정치는 나와 잘 안 맞는 옷이라고 생각했다. 사교적이고 뻥도 잘 쳐야 하며 팬덤도 만들어야 하는데 기질적으로 그런 것과 거리가 멀었다”고 했다. 특히 2012년 총선에서 낙선하고 가족들마저 낯선 부산 생활에 힘들어할 때 자신의 선택에 대해 번민하던 모습이 가슴에 남는다.

그런 그가 치열하게 부여잡은 것은 사람이나 세력보다는 명분, 그리고 부산이었다. 동남권 메가시티라는 화두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장본인이 김영춘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해 부산시장 선거에 나설 때는 “전장에 내보냈으면 싸울 칼을 쥐어줘야 할 것 아니냐”며 중앙당의 가덕신공항 특별법 처리를 압박했다.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한국해양진흥공사를 성공리에 안착시켰다. 이 모든 게 그의 공로는 아니지만, 이 정도로 오기까지 부산은 일정 부분 그에게 빚을 졌다.

합리적 보수를 자처하는 그는 극단으로 치우치는 당의 균형추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2020년 총선 전 중앙당의 비례위성정당 창당에 “명분도 없고 민주당 정신에도 어긋난다”고 일갈했고, ‘윤미향 사태’ 때에는 당내에서 처음으로 사퇴를 언급했다. 강성 지지층으로부터 ‘배신자’ 소리를 들었지만, 최근 그 당은 이 모든 사안을 고스란히 반성 했으니, 그를 비난했던 이들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0.73%’로 당락이 갈린 3·9 대선 직후 여야는 다음 정치의 최우선 과제로 통합과 협치를 한목소리로 외쳤지만, 그 메아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신구 권력 간, 여야 간 대치 전선은 사생결단식 대선 레이스의 연장전 같다. 여권에서는 “K-트럼프” “레임덕이 아니라 취임덕” 심지어 “법비들의 연성 쿠데타”라는 말까지 나온다. ‘허니문’은 커녕 대선 결과조차 수용할 수 없다는 태도다. 반대로 이제 곧 집권여당을 이끌어야 할 야당 대표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소수자나 약자를 차별하지 않는 태도)에 대한 대중의 피로감을 건드려 지지 수단으로 삼는 트럼프식 정치를 노골적으로 따라하고 있다. 증오와 갈라치기가 일상화된 독한 정치의 시대, 그래서 톡 쏘는 맛은 없지만 김영춘의 좀 맹숭맹숭한 순한 정치가 그리울 것 같다. 일부 독자들에겐 이 글이 불편하게 여겨질 수 있겠지만, 부산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10년 넘게 씨름하다 떠나는 사람에 대한 헌사이니 너무 탓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jc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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