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한 실천적 생명력 ‘조선 사상’이 역사의 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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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상사/오구라 기조

세계 문명의 판도가 변화하고, 동아시아와 한반도가 달라지고 있다. 인류가 서양 일변도의 근대를 새롭게 사유하고 있다. 그 속에서 우리의 전망은 무엇인가. 통독을 권할 만한 책이다. 는 입문서이지만, 그 수준을 넘어서는 한국 사상의 통사다. 단군 신화부터 21세기까지 철학 종교뿐 아니라 신화 정치 문화를 두루 아우르고 있다. 도쿄대에서 독문학을 공부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8년간 한국철학을 공부한 오구라 기조(63) 교토대 교수가 썼다. ‘조선’은 만주와 남북한을 포괄한 한반도 문명 전체를 가리킨다.

단군 신화~21세기까지 문명 전체 조명
일본 학자가 서술한 한국 사상의 통사
조선 사상사는 순수성 둘러싼 투쟁사
19세기 선명한 평등사상 ‘동학’ 등장
하늘과 사람 같다는 ‘조선적 영성’ 특징

지은이에 따르면 일본 사상이 도래 문화에 대한 브리콜라주(수선)의 포섭 방법을 취한다면 조선 사상은 전면적인 개변·혁명을 추진해왔다. 고려시대 불교에 의한 철저한 사회 변혁, 그다음 조선시대 주자학에 의한 혁명적 사회 변혁이 그렇고, 공산주의 사상에 의한 북한의 전면적인 사회 개변도 그렇다. 조선 사상의 특징은 책상에 머물지 않고 ‘혁명적 정치적 역할’이 매우 두드러진다는 거다. 이렇게 전면적 개변을 추구하는 것은 조선 사상사가 중국 일본의 그것과 달리 ‘순수성’을 지향해 왔기 때문이란다. 조선시대 성리학 사상투쟁, 남북한 이데올로기 투쟁 등 조선 사상사는 순수성을 둘러싼 투쟁사라는 거다. 비근하게 100년 전 위정척사사상과 오늘날 한국 386세대의 도덕성에 불타오르는 듯한 자기 동일화도 비슷해 보인다는 거다.

하지만 지은이가 보는 조선 사상의 가장 큰 특징은 ‘조선적 영성’이다. 영성은 지성, 이성, 감성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정신 현상인데 신라의 원효, 조선의 이퇴계, 19세기 경주의 최제우가 ‘조선적 영성’으로 묶어진다는 거다. ‘하늘과 사람은 같다’는 영적 세계관과, 대립을 회통하는 영성, 그것은 원효와 화랑, 이퇴계와 최제우를 관류하면서 역사 표면으로 때때로 분출하듯이 나타났다는 거다. 지은이는 ‘일본 풍(?)’으로 심지어 “조선적 영성은 경주와 영남 지방이라는 토지의 영(靈)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지은이는 ‘조선적 영성’의 뿌리로서 ‘신라적 영성’을 제시한다. 신라의 원효 의상 화랑 최치원의 사상은 아찔한 것이었는데 원효의 포월적인 화쟁 논리인 ‘불연(不然)의 대연(大然)’은 동학의 ‘불연기연(不然其然)’으로 이어졌다. 양명학 불교 도가를 종합하고 포월한 퇴계 사상 또한 원효의 회통과 다르지 않다는 거다. 퇴계와 수운에게 보듯 조선적 영성의 저류는 원효 이래 면면히 흐르고 있다는 거다. 이런 점은 “원효와 최제우는 일맥상통한다”(박종홍), “최제우는 이퇴계 좌파”(최재목) “동학의 ‘포접’은 최치원의 ‘포’함삼교(包含三敎) ‘접’화군생(接化群生)에서 왔다”(김지하)는 것으로 끊임없이 표현돼 왔다. 지은이는 기미 독립선언문도 침략을 받은 측이 침략한 측의 의식에 비해 몇 단계나 나아가 있는, 감성 지성 이성을 포월하는 조선적 영성의 탁월한 표현이라고 한다.

19세기는 흔히 세도정치에 의해 조선을 멸망에 이르게 한 암흑시대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제 관점을 달리해야 한다. 19세기는 다른 어떠한 동아시아 사상보다 선명한 평등 사상의 동학이 찬란하게 분출한 시기다. 김추사 김정호 최한기 김삿갓 등 파격적이고 독창적인 철학자와 문학자도 나왔던 시기라는 거다. 근대의 극복이라는 콤플렉스를 이제 벗어던진 조선은 능히 역사를 새롭게 볼 수 있다는 거다. 동학 이후, 기미년이 솟아올랐고, 한국전쟁과 냉전, 독재의 험한 과정을 거쳤으나 결국 민주화를 달성한 것이 한국이라는 거다.

하지만 한반도 판도 속에 놓고 보면 북조선은 항일유격대 활동에, 한국은 1919년 기미년에 기원을 각각 두고 있다. 뭔가 다른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회통하는 조선적 영성이 이 분단 상황을 극복해야 하고,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현대의 유영모 함석헌 백낙청 장준하 장일순 김태창 김대중 노무현 성철의 면모를 우리가 제대로 보기 시작하듯이 조선 역사와 사상을 하나로 꿰서 새롭게 전망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 사상은 어느 때부터 자본의 논리에 매몰됐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사상은 고통을 자처하는, 강인한 실천적 생명력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것이 우리이고, 그것이 희망이다. 오구라 기조 지음/이신철 옮김/도서출판 길/386쪽/2만 8000원.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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