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태의 요가로 세상 보기] 59. 기도하는 손, 아트만잘리 무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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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만잘리 무드라’에서 두 손을 가슴에 모으는 것은 내면을 한곳에 집중하고, 조화와 균형·평온·침묵·평화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된다. 시연 임은주. 詩 낭송 최진태. ‘아트만잘리 무드라’에서 두 손을 가슴에 모으는 것은 내면을 한곳에 집중하고, 조화와 균형·평온·침묵·평화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된다. 시연 임은주. 詩 낭송 최진태.

일반적으로 제반 종교에는 두 손을 모으는 것으로 기도나 의식을 시작한다. 두 손을 모으는 것을 ‘합장(合掌)’이라 한다. ‘기도하는 손’이다.

음과·양, 하늘과 땅, 나와 우주, 아트만과 브라흐마의 만남이다. 요가에서는 이를 일러 ‘아트만잘리 무드라(Atmanjali Mudra)’라고 한다. ‘나’라는 의미의 아트만(atman)과 ‘경배하다’라는 뜻의 안잘리(anjali)가 합쳐진 말이다. 그래서 ‘합장 자세’는 경배와 축복의 의미를 담고 있다.

요가 수련에서 ‘합장 자세’는 나무 자세(브릭샤 아사나)나 태양경배 자세(수리야 나마스카 아사나) 등의 두 손을 맞대는 모든 아사나에 수반된다. 이는 평온함을 의미하며, 또한 자신의 내면으로 되돌아온다는 뜻이 담긴 손동작이다.

‘합장 자세는 영적 깨달음을 향한 의지의 발전 가능성을 상징한다.’(크리슈나 마차리야)

‘아트만잘리 무드라’에서 두 손을 가슴에 모으는 것은 내면을 한곳에 집중하고, 조화와 균형, 평온, 침묵, 그리고 평화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된다. 존경을 표하는 무드라이다. 이것은 신과 수행자 사이의 관계를 봉인하기 때문에 신들을 기쁘게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 무드라는 좌뇌와 우뇌를 똑같이 활성화하고 조화롭게 한다. 신의 도움을 구할 때와 소망을 이루고 싶을 때 기원하는 명상을 보완해 준다.

인도에서는 이 무드라를 인사나 감사와 사랑, 즉 나마스테·단네야드·발로바쉬 등의 인사말과 함께 행해지기도 하며, 이 자세를 취하면서 평화와 기쁨 속에 깊이 잠기곤 한다.

무드라(mudra)는 범어로 제스처, 몸짓, 인장, 도장, 봉인, 제의(祭儀) 라는 뜻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무드라를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우리의 몸과 마음, 영혼의 각 단계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이미 일상 속에서 어느 정도는 손으로 하는 무드라를 행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예컨대 누군가를 축복하기 위해 손가락으로 십자가를 만들어 보인다든지, 박수갈채를 보낸다든지, 악수를 하거나 손을 잡는 행위 또는 상대방의 생각을 경멸하는 뜻으로 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행위 등이 그것이다.

합장한 손 모양이며 아트만잘리 무드라와 거의 유사한 모습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이라고 일컫는 ‘기도하는 손(praying hand)’의 그림을 떠올린다.

르네상스 시대의 독일 화가인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의 1508년 작품이다. 그는 북유럽의 다빈치라고도 불렸다. 종이 위에 브러시와 잉크를 사용하여 그린 이 작품은 자신을 위해 희생한 친구 프란츠의 기도하는 손을 모델로 한 것이다.

서로는 화가의 꿈을 갖고 있는 친구 사이로서 둘 다 가난하여 일을 하느라 그림을 그릴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둘 중 한 사람이 먼저 공부를 하고 그동안 남은 한 사람은 돈을 벌자, 그리고 나서 나머지 한 사람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약속을 하게 된다.

이로써 먼저 공부를 하게 된 뒤러는 마침내 성공을 했으나 그의 친구 프란츠는 그림을 그리기에는 힘든 손이 되었다. 그간 거칠고 험한 고생으로 인해, 손마디가 뒤틀리고 투박해진 손이 되었다. 친구는 열심히 일을 하면서 뒤러의 학비를 댔다. 그리고 친구는 뒤러를 위해 매일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제 친구 뒤러가 부디 성공한 화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며 원망 대신 감사를 드리는 그 모습을 보고 뒤러는 크게 감명을 받아 종이에 그 친구의 ‘기도하는 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기도하는 손이 가장 깨끗한 손이요, 가장 위대한 손이요, 기도하는 자리가 가장 큰 자리요, 가장 높은 자리다”라는 말도 남겼다.

그 밖에도 조수아 레이놀즈의 ‘꼬마 사무엘’, 에릭 엔스트롬의 ‘감사의 기도(The Grace)’, 밀레의 ‘만종’ 등이 떠오른다. 어느 작품이나 많은 눈물과 기도와 정성이 숨어 있듯이 한 알의 밀알이 많은 열매를 맺기까지 수많은 사연이 숨어 있다.

그렉 브라이든은 그의 저서 ‘잃어버린 기도의 비밀’에서 ‘기도’에 대해 주옥같은 말을 쏟아내고 있다.

“굳이 신앙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삶의 어려움이 닥쳐오면 모두들 기도를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기도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류의 95%가 우주를 창조한 신비로운 힘의 존재를 믿고 그것에 말을 걸기 위해 기도를 한다.”

“기도는 경험에서 우러나는 교훈을 우리네 삶에 적용하게 해주는 언어이다.”

“24시간 무릎 꿇고 옛 기도문을 낭송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기도를 가끔씩 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우리가 항상 돼야 하는 무언가로 받아들이라.”

“우리가 느끼는 것 즉 기도하는 것이 신의 마음에 의해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것이 바로 인생이다.” 등이다.

기도 중에서 몸을 제일 낮추어 하는 기도가 ‘오체투지(五體投地)’다. 이마와 두 팔꿈치 그리고 두 무릎을 땅에 붙이고 인사하는 방법이다. ‘오체투지 기도 자세’ 역시 두 손을 모으는 ‘합장 자세’, ‘아트만잘리 무드라’로부터 시작한다.

무릎을 꿇고 땅에 이마를 닿아 절하는 것은 땅의 마음, 영원의 마음에 닿아보고 싶어서이다.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어서 기도를 드리면 마음이 열려 평화가 꽃피고 미소의 향기가 흐른다. 세상이 더 순하고 더 넓어진다. 오체투지 자세는 우리의 잘못된 속성 즉 교만심과 아만심(我慢心)까지도 고개 숙이게 하고 하심(心)을 하도록 만든다.

우리가 우리보다 더 큰 의식과 접촉하기 시작하면 그 순간 개인의 영역을 뛰어넘는다. 그때 우리는 시공간을 넘어 동일한 파동을 지닌 존재들과 연결되는 이치랄까.

오체투지 기도 자세가 “그대는 비굴하지 않게 거룩하게 무릎을 꿇어 보았는가”라고 묻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전진하는, ‘오체투지 기도 자세는 출근하면 밥그릇 앞에서 가장 낮아지는 직장생활과 흡사하다’고 어느 유명 작가는 말하고 있다. 서글프지만 그게 현실인 걸 어이하랴.

‘퀘런시아(querencia)’라는 말은 스페인어로 자아회복의 장소, 피난처, 안식처를 뜻한다. 류시화 시인은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수필집에서 퀘런시아에 대해 잘 설명해주고 있다.

“투우장 한쪽에는 소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구역이 있다. 투우사와 싸우다가 지친 소는 자신이 정한 그 장소로 가서 숨을 고르며 힘을 모은다. 기운을 되찾아 계속 싸우기 위해서다. 그곳에 있으면 소는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소만 아는 그 자리를 스페인어로 퀘런시아라고 부른다. 퀘런시아는 회복의 장소이다. 세상의 위험으로 부터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 힘들고 지쳤을 때 기운을 얻는 곳, 본연의 자기 자신에 가장 가까워지는 곳이다. 안전하고 평화로운 나만의 작은 영역 인간 내면에 있는 성소(聖所)를 지칭한다.”

"삶은 자주 위협적이고 도전적이어서 우리의 통제 능력을 벗어난 상황들이 펼쳐진다. (중략)삶에서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매일 매일이 단조로워 주위 세계가 무채색으로 보일 때,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상처 받아 심장이 무너질 때, 혹은 정신이 고갈되어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 버렸을 때, 그때가 바로 퀘런시아를 찾아야 할 때이다.(중략)그럴 때마다 자신만의 영역으로 물러나 호흡을 고르고, 마음을 추스르고, 살아가는 힘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숨을 고르는 일은 곧 마음을 고르는 일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아니 자연발생적으로 온몸에서 발현되는 것이 바로 ‘기도’ 그 자체가 아닐까? 그러면 기도는 어떻게 할까? 이문재 시인의 ‘오래된 기도’ 시(詩)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 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어 마시기만 해도.”

이문재 시인 그가 평생 경구(警句)로 삼고 있다는 “조금 알면 오만해진다. 조금 더 알면 질문하게 된다. 거기서 조금 더 알게 되면 기도하게 된다”는 내용을 이 시로 표현했다고들 한다.

많은 이들이 ‘기도’를 자기 나름대로 설명하고 있다.

“이제 보니 기도는 의식이 아니라 나의 손끝 나의 말 나의 눈길과 나의 숨소리 이 모든 것이 기도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익히 해오고 있었던 일들같이.”

“그러고 보니 기도는 아름답기까지 하다. 기도란 잠시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천천히 시간을 갖고서 성찰하는 그 순간이다.”

“기도는 만물 앞에 나의 존재를 겸허하게 낮출 때 비로소 얻게 되는 깨달음이다.”

“기도는 이렇게 일상으로 녹아들어야 하며 특별한 시간, 공간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세속에서 하는 일이 다 기도가 된다.”

“기도는 꼭 정해진 규칙이나 방법이 없을 수도 있다. 그냥 두 손을 맞잡은 채 가슴 앞에 모으고, 가만히 가슴 속에서 우러나오는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도 기도다. 꼭 신의 존재를 믿지 않더라도 할 수 있는 것이 기도다.”

“살다 보면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위기와 고통과 괴로움의 순간과 마주쳤을 때, 그때 알지 못하는 신에게 간절히 무언가를 비는 일도 기도이다.”

“평범한 진리에 대해 인식하고 스스로 질문을 던질 때, 가끔씩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볼 때도 본인은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는 그래서 일상의 호흡이고 생활 속의 대화이다. 살아 있는 순간 그 자체이다.”

“무엇을 믿던 누구를 믿던 모든 순간에 기도를 하는 우리는 그 자체가 구도자의 삶이다. 감사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살아 있는 자신의 기도이다.”

“오늘 잠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서 마음속 깊이 둔 사람의 이름을 한 번 불러 보는 것 자체도 기도다. 절대의 세계 앞에 부끄러운 마음 되어 조용히 다가앉는 것 그것도 기도이다.”

“기도란 절대자 앞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리는 영적인 포복이다. 몸을 숙이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절대자 앞에 무릎 꿇는다. 그리고 기도는 머리로 믿는 것을 가슴으로 느끼는 절차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전 인격적인 반응을 통하여 절대자의 뜻을 헤아리고 추적하는 작업이다. 참다운 기도는 자신이 소원하는 바를 간구하기보다는 스스로 충만하고자 함이 우선이다. 자신을 성찰하고 다듬는 시간이기에 기도하는 동안엔 선한 마음으로 그득해진다. 그러므로 기도할 수 있다는 자체가 은혜이고 기도하는 자체가 능력이다.”(권순진 시인)

“기도는 하늘에서 축복을 받고, 노동은 땅에서 축복을 따낸다. 기도는 하늘의 차(茶), 노동은 땅의 차(茶), 이 둘은 당신의 집에 행복을 실어다 준다.”(몽테뉴)

다음은 재미있고 특이한 기도문 몇 가지를 소개한다.

“이른 아침에 먼지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먼지가 된 나를 하루 종일 찬란하게 비춰주셔서 감사합니다.”(햇살에게 / 정호승)

“주님 제 몸이 갑자기 불거나 마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입고 있는 이 옷이 제 마음에 꼭 들거니와 제게는 이 옷 한 벌밖에 없기 때문입니다.”(가난한 수도자의 기도/작자 미상)

“주님 저로 하여금 죽는 날까지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게 하시고, 마지막 날이 찾아와 당신이 던진 그물에 내가 걸렸을 때 바라옵건대 쓸모없는 물고기라 여겨 내던져짐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어부의 기도/작자 미상)

인도의 빈민가에서 누더기 옷을 걸친 어린이들을 안고 있는 늙은 데레사 수녀, 손가락이 오그라 붙은 나병환자들의 손을 잡고 얼굴을 비비고 있는 빈민(貧民)의 성인(聖人) 데레사 수녀의 기도는 언제나 맑은 눈물 속에서 시작된다.

“나의 관심은 인류의 미래가 아닙니다. 우주시대와 과학 문명이 아닙니다. 참혹한 현실의 구석구석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와 절망의 어둠 속에 가 있습니다.(중략) 나의 기도는 목이 마르고 응답에 가슴이 탑니다. 타오르는 촛불의 그 맑은 눈물을 제게 주십시오. 노벨 평화상보다 목마르지 않는 눈물을 주십시오. 그 눈물로 하여금 고통 받는 자들의 마음을 씻어주는 샘이 되게 하십시오. 그래서 말씀의 샘, 은총의 샘이 넘쳐서 언제나 제 기도가 목마르지 않게 해 주소서…” 라는 기도 말씀에는 목이 잠겨 온다.

“바람결에 당신의 음성이 들리고/ 당신의 숨결이 자연에게 사랑을 줍니다./ 나는 당신의 수많은 자식들 중에 힘없는 조그만 아이입니다./ 내게 당신의 힘과 지혜를 주소서/ 나로 하여금 아름다움 안에서 걷게 하시고/ 내 눈이 오랫동안 석양을 바라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 만물을 내 두 손이 존중하게 하시고/ 당신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내 귀를 열어 주소서/ 당신이 우리 선조들에게 가르쳐준 지혜를 나 또한 배우게 하시고/ 당신이 모든 나뭇잎 모든 돌 틈에 감춰 둔 교훈을/ 나 또한 깨닫게 하소서/ 다른 형제들 보다 내가 더 위대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큰 적인 나 자신과 싸울 수 있도록 내게 힘을 주소서/ 나로 하여금 깨끗한 손 똑바른 눈으로 언제라도 당신에게 갈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소서/ 그리하여 저 노을이 지듯이 내 목숨이 다할 때/ 내 혼이 부끄럼 없이/ 당신 품 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나를 이끌어 주소서.”(아메리카 수우족의 기도문)

기도의 말, 기도의 집, 기도의 세계, 기도의 빛깔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자신만이 아닌 타인을 위해 진실하게 간절하게 기도해 본 일이 얼마나 있었을까도 반문해 본다. 남도 이롭게 하면서 자기 자신도 이롭게 하는 것,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한다는 뜻으로 ‘자리이타(自利利他)’란 말이 있다.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원만하고 완전하게 수행한 이를 부처라 한다. 이익자타(利益自他) 즉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함을 말한다.

자신과 우주라는 한 몸의 손과 팔 같은 모든 만물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자리이타’다. 이 말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성경의 황금률과 동일하다. 동서고금에 모두 통용되는 윤리관인 셈이다.

다른 사람이 내가 만든 사다리를 딛고 정상에 올라갈 때, 사다리를 만든 사람은 비로소 성공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성공을 돕는 것, 내가 받는 게 아니라 얼마나 많이 주느냐가 참 성공의 척도이다. 이렇듯이 세상에 태어나 받는 것보다 주는 게 많아야 성공한 인생이란다.

나로 인해 세상이 더 살만해진다면, 단 한 사람이라도 그렇게 느껴진다면 성공한 인생이라는 말이다.

우스갯소리로 과거엔 ‘공부해서 남 주나’ 했지만 ‘공부해서 남 주지’로 바뀐다면 얼마나 멋있는 삶이 될까? 베풀고 사는 삶 말이다.

그런 걸 일러 인도에서는 ‘카르마 요가(Karma Yoga) 수행자’라 칭한다.

세상이 점점 더 좋아지는 건 부분적으로는 남에게 드러나지 않게 베풀면서 인생을 충실하게 살았고, 지금은 편안히 잠들어 있는 수많은 사람들 덕분이기도 할 테다.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그대가 있었기에 한 생명이라도 좀 더 수월하게 숨을 쉬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 이런 것이 성공이다.” 미국 시인 랠프 윌도 에머슨의 말이다.

이어서 에머슨은 지적하고 있다. “진심으로 남을 도우면 결국 자신에게도 도움이 된다. 이것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상의 하나다”라고.

생명의 바다와 죽은 바다, 받은 만큼 주는 ‘갈릴리해 바다’와 받기만 하고 줄 줄을 모르는 ‘사해(死海)바다’. 사람도 두 종류가 있다. 우리는 ‘갈릴리해’가 될 수도 있고 ‘사해(死海)’가 될 수도 있다.

내가 살기 위해 너를 돕는 것이 아니라 너를 살렸더니 나까지도 살 수 있는 것, 이것이 ‘자리이타’가 주는 삶의 기적이다.

“나와 관계있는 사람의 행복이 있기 때문에 나의 행복 또한 있는 것이다.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나와 관계가 있는 다른 사람이 행복을 느껴야 한다. 내가 남의 행복을 바라며, 그것을 위해 전력을 다할 때 행복이 온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남을 위해서 한 일이 그대로 나에게 되돌아오고, 또한 그 일이 나를 위해서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행복도 기쁨도 남을 먼저 생각하고 위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마스노 순묘 昇野俊明, ‘깃털처럼 가볍게 살아라’ 중에서)

사뭇 들뜨기 쉬운 시절이다. 오늘은 무릎 꿇고 가슴 앞에 ‘기도하는 손, 아트만잘리 무드라’ 취하면서 ‘자리이타(自利利他)’ 화두(話頭)로 마음을 추슬러 보고자 한다.


[ 기도하는 손 / 최진태 ]

내 생명의 일부를/ 하늘빛 찻잔에 담아내는/ 나눔과 베품의 삶/ 남을 위해 '기도하는 손'은/ 내가 순하고 작아져야만 이룰 수 있다.

먼저 낮추고/ 먼저 끌어 올려주고/ 먼저 섬기는 손

매일 매일의 삶이 안겨주는/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속에서/ 아직 비어 있는 가난한 마음의 항아리들

가난해서 더 뜨거운/ 우리의 가슴속 솟대 위에/ 생명의 불을 밝힐 수있는/ 그 열기 하나로/ 차디 찬 땅을 데울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한 점 별로 뜰 수 있다면

온 몸으로 밀고가리라/ 티벳 성자의 오체투지 자세로/ 가까운 길도/ 멀리멀리 돌아가리라/ 먼 길도/ 가깝게만 느껴지리라/ 흐르고 또 흐르는 세월의 강물 속으로/ 모든 것 허망하게 다 떠내려가도/ 오직 변치 않는 그 무엇하나 부여잡고

고독하지만 깨어있는/ 순례자로서의 길을/ 갈 수 있기를/ 소망하고 간구하는/ ‘기도하는 손’ 되게 하소서


최진태 부산요가지도자교육센터(부산요가명상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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