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김건희 슬리퍼에 비친 김정숙 패션
박석호 서울정치팀 부장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정부 출범 한 달쯤인 2017년 6월 한·미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당시 몇몇 언론이 김정숙 여사가 3박 5일의 방미 기간에 동일한 원피스를 세 번이나 입는 소탈한 모습을 보였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김정숙 여사는 흰 원피스 위에 재킷이나 코트만 바꿔 입어면서 일정을 소화했다고 한다. 워싱턴 도착 때는 하얀 원피스에 푸른 메타세쿼이아 나무와 작은 향나무가 그려진 파란 재킷을 걸쳤고, 같은 날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방문할 때는 동일한 원피스에 추모의 의미가 담긴 검은색 재킷만 바꿔 입었다.
김정숙 여사 방미 때 같은 원피스 세 번 입어
5년 뒤엔 원피스 바깥에 걸친 옷들이 구설수
김건희 씨 3만 원짜리 슬리퍼 신는 사진 화제
소박함도 좋지만 자신만의 솔직한 패션이 정답
다음 날 워싱턴 주미대사관저에서 열린 간담회에서는 하얀 원피스 위에 홍화로 물들인 한국 전통 누비옷을 걸쳤다. 토머스 허버드 전 주한 미국대사 부인이 관심을 보이자 그 자리에서 벗어 선물했다는 바로 그 옷이다.
청와대에서도 머리 손질과 화장을 직접한다는 김정숙 여사는 방미 때 전속 미용사를 대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외교부 측이 현지 교민 미용사를 섭외했는데 이때도 ‘너무 비싸면 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내세웠다고 한다.
코트와 재킷 안에 받쳐 입은 원피스는 순방 내내 밀착 수행한 청와대 인사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사실이다. 현지 미용사 섭외도 최측근이 아니면 모를 일이어서 ‘김정숙 여사의 소탈한 패션’ 기사는 당연히 청와대가 출처였다.
그런데 불과 5년 만에 김정숙 여사의 검소한 패션은 청와대 특수활동비 공개 파문과 맞물려 ‘도를 넘는 화려한 패션’으로 변신했다. 심지어 “누가 김 여사의 옷값을 대줬느냐?”는 ‘옷값 스캔들’로까지 비화하고 있다.
5년 전 세 번이나 입었다던 원피스는 보이지 않고, 원피스 바깥에 걸친 재킷과 누비옷은 네티즌 수사대가 긁어모은 200여 벌의 화려한 의상 리스트에 올랐다. 김정숙 여사의 패션이 5년 만에 상반된 평가를 받는 것은 왜일까?
권력을 내려놓는 자에게 가해지는 각박한 인심, 억지로 소탈함을 연출한 청와대 참모들의 무리수 등이 원인이다. 거기에 한 가지 추가하면 살아온 삶을 부정하는 작위적 태도도 꼽지 않을 수 없다.
김정숙 여사에게는 자신만의 패션이 있었을 것이다. 부산에서 인권 변호사로 일하는 넉넉하지 않는 남편을 만나 전업주부로 살아온 사람이다. 이런 인생의 스토리가 김정숙 여사에게 스며 있다. 그런데 이런 현실을 감안하지 않고 그녀를 돋보이게 하려는 청와대 참모들의 과욕과 이를 제지하지 않은 김정숙 여사의 무신경이 임기말 문 대통령을 더욱 힘들게 한 것이다.
그런데 요즘 또다른 권력자의 배우자에게 ‘김정숙 여사 패션’이 아른거린다.
얼마 전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부인 김건희씨가 서울 서초구 자택 앞에서 경찰견을 끌어안고 촬영한 사진이 공개됐다. 사진 속 김건희씨는 자줏빛 후드티에 통 넓은 9부 청바지를 입었다. 동그란 안경과 흰 슬리퍼(3만 원짜리로 추정된다고 한다)를 착용해 수수하고 편안한 차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세월호 참사 8주기 다음 날인 지난 17일엔 노란색 스카프를 매고 윤 당선인과 반포한강공원을 산책하는 사진이 인터넷을 장식했다. 반려견 토리도 함께였다. 이날 옷차림도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의미로 쓰이는 노란색 매듭이 눈에 띄었지만 꽤나 소탈한 모습이다.
이런 사진들이 잇따라 공개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독자 제공’이라는 출처가 달렸지만 대통령 당선인과 배우자는 국가원수급 경호와 의전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가까운 곳에서 카메라를 들이댈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당선인 측이 철저하게 계산해서 이런 사진을 내놓았고, 이를 준비하는 김건희 씨도 엄청난 품을 들여 수수함과 소박함을 연출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우리 국민들은 대통령 부인의 옷이 초라해 보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중은 이중적이어서 대통령 부인이 비싼 옷을 입으면 안줏거리로 삼고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본다.
대통령이든 당선인이든 그 배우자든 자신의 스토리를 담은 옷, 자신의 부에 걸맞은 패션을 즐기면 된다. 수십억 재산에 전시 기획자로 이름이 알려진 김건희 씨가 ‘소박한 대통령 부인’을 요구하는 민심에 억지로 맞추다가는 ‘제2의 김정숙 여사’가 될 수 있다.
김건희 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명품을 입어야 할 일이 있다면 사비로 구입하겠다”고 말했다. “임기 5년 동안 명품은 절대 입지 않겠다”는 다짐보다는 훨씬 솔직해서 그나마 다행이다. psh21@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