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술값은 내가 냈으니/권상진(19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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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여섯 번 그는 술을 마시고

나는 몇 줄의 시를 적는다

고작 카톡 메시지나 식당 메뉴판 정도가

하루에 읽는 활자의 전부였지만

그는 술을 마시면 시를 뱉었다

(중략)



내가 시 속에 가둔 문자들이

종일 켜놓은 모니터에 매미 허물처럼 붙어있거나

눈만 껌벅이며 뒷말을 더듬거릴 동안

빈병 너머로 흩어지던 그의 입담들

나는 길바닥에서 운 좋게 만난 동전처럼

두리번거리며 그의 말을 꾹 밟는다

몰래 주워 묻은 흙을 털어내고

말더듬이 문장 뒤에 슬쩍 끼워 넣는다

술값은 내가 냈으니 표절은 아니다



-계간 2021년 겨울호에서

간혹 지인들이 무심코 뱉는 말 속에서 시적 언어들을 나꿔챌 때가 있다. 시인의 지인도 술을 마시면, 시인에게 시적 언사를 들려주나 보다. 시인은 지인의 입말을 가져와 자신의 ‘문장 뒤에 슬쩍 끼워’ 넣고 ‘술값은 내가 냈으니 표절은 아니다’라고 눙친다. 우리 시에서는 돈이 등장하는 시가 드문데, 시인은 술값을 얘기하며, 시인만이 가진 염결성을 보여준다. 이 염결성은 귀한 태도이다. 시는 쓰는 자의 인식이 우선이겠지만, 사실은 태도가 가장 중요하지 않겠는가. 필자도 늘 호구 소리 듣는 축에 속해 술값은 내가 내야 한다는 허세와 강박이 있지만, 이 시를 읽다가 문득 술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생겼다. 앞으론 내가 한 번 사면 너도 한 번 사라. 성윤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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