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돌아온 북항, 그리고 '파친코'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이호진 편집국 부국장

해 질 녘, 어둠과 빛의 경계인 이 시간에는 사람의 감성을 증폭시키는 힘이 있다. 검푸르게 변해가는 동쪽 바다, 한가로이 떠 있는 배들, 하나둘 불 밝히기 시작하는 건물들, 환한 기운이 사그라져가는 서쪽 산등성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노란 유채꽃, 느긋하게 걷다 스마트폰 카메라 앞에 포즈를 취하며 하하 호호 웃는 가족들, 한낮의 더위를 식히는 상쾌한 바람까지. 시민에게 개방된 지 이틀 만에 찾아간 부산항 북항 1단계 재개발지역 친수공원은 풍경만으로도 환상적인 산책 코스였다. 2004년 9월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지시로 시작된 북항 재개발 사업이 온갖 질곡을 딛고 18년 만에 결실을 맺은 것이다.

2008년 정권이 바뀐 뒤 북항 재개발은 2017년까지 9년간 사실상 횡보했다. 노 전 대통령 지시로 친수공간 비중을 높였던 사업계획이 새 정부 국정 방침에 따라 수익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변경되면서 지역 시민사회의 반발을 샀다. 시민사회 여론 수렴 체계 재정립, 정부 통합 추진단 발족 등의 조치가 이뤄진 건 문재인 정부 들어서다. 2018년 3월 부산항 북항을 찾은 문 대통령은 임기 내 기반시설 완공을 천명했다. 현장에서 이 발표를 들은 기자는 목표에 그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눈에 보이는 공사 진척이 너무 더뎠기 때문이다. 부족한 면이 있지만 결국 임기 내 준공 약속은 지켜졌다. 해양수산부와 부산항만공사 관계자, 그리고 짧은 시한 내 어려운 공사를 큰 탈 없이 마무리 지은 관련 업체와 현장 노동자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북항 친수공원 시민에 완전 개방
풍경만으로 명품 공원 조건 충분
현대사 질곡·영예도 그대로 품어

국정과제에 2030엑스포 포함돼
북항 2단계 재개발도 순풍 기대
해양신산업 요람 비전·전략 필요


북항 친수공원을 걸으며 요즘 드라마에 이어 원작 소설까지 다시 열풍을 불러일으키는 재미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가 떠올랐다. 우리 현대사에서 부산항은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기에 ‘파친코’와 부산항도 밀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876년 개항부터 일제와의 불평등 조약에 의해 이뤄졌고, 1906년 축조를 시작한 1부두는 식민지 시기 우리 조부모 세대가 징용과 성노예로 끌려가고 일본 군인들이 첫발을 내딛던 곳이다. ‘파친코’에서 선자가 일본에 건너갈 때 탄 연락선도 부산항 1부두에서 뱃고동을 울렸을 것이다. 해방 후 귀국 동포들이 내려선 곳이자, 한국전쟁 당시에는 연합군의 최우선 보급 통로였다. 이후 경제 성장기에는 부두를 자성대부터 신선대까지 확장해 우리나라 최대 교역 창구로 한국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개항 130년 만인 2006년 가덕도 인근 부산항 신항 개항이 예정되면서 북항의 물류 비중 감소를 내다본 노 전 대통령이 북항 재개발을 지시한 것이다. 이렇게 한국 현대사와 함께한 부두에 조성된 공원을 걸으며 ‘파친코’ 선자가 떠올랐다가 불과 10여 년 전까지 이 부두로 무수히 오갔을 대형 컨테이너선과 부두 노동자들이 생각났다. “역사가 우릴 망쳐놓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이민진 작가의 말처럼 끈질기게 삶을 이어온 우리 민족이다. 풍경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이런 역사의 질곡과 영예를 동시에 묵묵히 간직한 공간이라는 단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정취를 더했다.

이제 부산시민과 부산역을 오가는 관광객들은 북항 공원 이곳저곳을 충분히 즐겨볼 일이다. 철책선에 막혔던 북항이 이렇게 아름다운 곳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휑하지만 연안여객터미널을 개보수한 부산항기념관, 1부두 창고를 리모델링한 복합문화공간 등 공공시설이 2~3년 이내에 순차적으로 들어선다. 5년 뒤엔 중앙동에서 트램을 타고 공원 중심부로 편하게 갈 수 있다.

10일 출범하는 윤석열 정부가 2030부산월드엑스포를 110대 국정과제 중 하나로 선정한 것은 다행이다. 엑스포 부지를 확보하는 북항 재개발 2단계 사업이, 과거 1단계 사업처럼 차질을 빚지는 않게 되었다는 의미다. 내년 상반기 국제박람회기구(BIE) 실사에 치밀하게 대응해 유치 결정까지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각축의 20세기를 넘어 상생 공존하는 지구의 미래와 강인한 인류 생명력을 논하기에 이보다 적합한 장소는 없을 것이다.

4년 뒤면 부산항 개항 150주년이다. 시민 친수공간과 함께 미래 부산을 이끌어갈 새로운 해양 산업체가 입주해 더 이상 청년이 떠나지 않는 부산이 되기를 바란다. 중국의 장악력이 커진 홍콩을 떠나는 글로벌 기업이 늘고, 공급망 변화와 함께 수에즈운하를 대체하는 북극항로가 논의되며 싱가포르의 지경학적 위상도 약해진다. 해양도시 부산 북항은 이런 변화의 최대 수혜자가 될 조건을 충분히 갖췄다. 다음 달 1일 선출할 새 부산시장에게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글로벌 정보와 인재, 자본을 북항에 끌어올 비전과 전략이 있는지 꼼꼼히 따져야 한다. 리더의 의지와 비전이 지역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북항이 생생히 보여주지 않는가. jiny@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