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필리핀의 역주행
1521년 마젤란의 발길이 닿은 이래로 필리핀은 1898년까지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이후 미국의 지배 아래 있다가 마닐라가 일본군에 점령된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의 통치를 받았다. 마침내 주권 국가가 된 때가 1946년, 그러니까 근대 이후 걸었던 길이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필리핀은 동남아의 선진국이자 아시아의 맹주였다.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의 부국으로 우리가 부러워하는 우월적 형편을 자랑했던 나라다. 1960년대에 서울 장충체육관 건물을 필리핀이 지어 줬다는 풍문까지 나돌았는데, 사실은 아니었지만 필리핀의 경제력이 우리보다 훨씬 높았던 시절의 분위기를 알려 주는 일화라 하겠다.
두 나라의 지도자로 곧잘 비견되는 인물이 마르코스와 박정희다. 1917년생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장기 집권과 철권통치 등 여러 면에서 유사한 모습을 보였다. 박 전 대통령은 1966년 동남아 순방 일환으로 필리핀을 방문했다. 두 정상의 만남을 지켜 본 당시 이동원 외무부 장관이 이런 회고를 남겼다. “날카로운 눈매와 아담한 체구, 까무잡잡한 얼굴에 카랑카랑한 목소리까지 영락없이 닮았더라.”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정상회담 당시 마르코스로부터 외교적인 결례 등 갖가지 홀대를 받았다고 한다. 필리핀을 한국이 뛰어넘어야 할 대상으로 만든 건 상처 난 자존심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1980년대 이후 두 나라는 사뭇 다른 길을 걷는다. 한국이 고도성장의 궤도에 안착한 반면 필리핀 경제는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1963년의 1인당 국민소득은 필리핀이 257달러, 한국은 79달러로 필리핀이 3배 이상이었다. 그런데 1985년에는 필리핀 546달러, 한국 2242달러로 크게 역전돼 있다. 마르코스의 폭정과 축재, 부정부패 탓이 컸다. 필리핀은 지금 부국의 위상에서 추락해 가난에 허덕이는 슬픈 나라로 남아 있다. 현재 국민소득 수준이 우리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최근 필리핀 대선 결과 마르코스의 아들이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됐다고 한다. 마르코스 일가가 시민들에 의해 쫓겨난 지 36년 만의 화려한 부활이다. 마르코스 ‘왕조’가 다시 활개를 칠 가능성이 커지자 시민단체들이 거세게 반발하는 등 후폭풍이 예상된다. 놀라운 점은 마르코스에 대한 20·30대 젊은 층의 지지도가 매우 높다는 사실이다. 유권자 절반 이상이 과거의 폭정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역사는 슬그머니, 묘하게, 되풀이된다. 희극이 될지, 비극이 될지 아직 알 수 없지만.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