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칼럼] ‘파친코’가 보여 준 이야기의 힘
주영은 공모 칼럼니스트
“잘 사는 거보다 어떻게 잘 살게 됐는가, 그기 더 중요한 기라.”
드라마 ‘파친코’에서 배우 윤여정이 연기한 노년의 선자가 손주에게 건네는 한마디다. ‘파친코’는 일제강점기를 겪은 조선인과 이민 가족의 삶을 담은 드라마다. 극 중 선자는 이민 가족 1세대로, 일본에서 아들과 손주를 키워 낸 가장이자 굳센 여성이다. 지금의 번영과 자유를 누리며 사는 우리가 쉽게 가닿을 수 없는 삶의 모습이고, 공감할 수 없는 사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옛날 한 이민 가족의 이야기에 세계가 감동하는 걸 보면 ‘파친코’는 역사적 사실을 다룬 드라마 그 이상의 가치를 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야기는 타인과 소통하는 통로
세대와 계층 사이 놓인 간극 줄여
개개인의 삶을 큰 물줄기로 잇는 길
드라마 ‘파친코’의 위대함도 스토리
지구촌 국경을 초월한 공감대
미래의 희망과 전망까지 보여 줘
우리 조상은 일본의 무자비한 식민통치를, 남북전쟁이 할퀴고 간 참담한 현실을, 지독한 가난을 견뎌 냈다. 여기까지는 교과서에서 수도 없이 배웠던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떻게’ 견뎌 냈는지는 자세히 모르는 일이다. ‘파친코’ 속 교포 3세대인 솔로몬도 마찬가지였다. 자라 오면서 할머니가 고생한 세월 이야기는 수도 없이 들었겠지만, 그는 결코 본 적 없고 겪은 적 없기에 그 시절 이야기를 꺼내는 할머니를 보고 “그만 좀 하시라”며 몰아세운다. 마냥 재미있기만 하던 어른들의 옛날이야기가 어느 순간부터 지겹게 들린 건 솔로몬만의 경험이 아닐 것이다.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다. 살아온 세월이 다르고 경험한 사건이 다르다. 그중에서도 세대 차이는 어느 시점에나 존재한다. 누구는 불황의 시대를 통과하며 가난의 시절을 또렷하게 기억하는 반면, 누구는 활황기에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라기도 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유능한 정치가가 나타난다 해도, 각자 다른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 간의 격차는 존재한다. 우리는 결코 타인으로 살아 본 적 없고, 살 수도 없어서 그렇다. 그런데 한껏 벌어진 격차를 조금 줄이는 방법이 있다. 그건 바로 ‘이야기’로 만들어 보는 방법이다. 한 인물의 시점으로 세상을 그려서 그 사람의 삶을 간접 체험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물에게 몰입하는 순간, 이야기는 타인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로 기능한다.
‘파친코’를 만나기 전까지는 일제강점기를 겪은 할머니를 멀고 먼 사람으로만 생각했다. 학교에선 ‘그때의 대한민국을 지킨 조상들이 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고 가르쳤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가슴으로는 아니었다. 하지만 ‘파친코’ 속 선자의 서사는 그 시절을 겪어 본 적 없는 나를 순식간에 일제강점기의 부산으로 데려갔다. 선자는 내가 되었다가, 우리 엄마가 되었다가, 우리 할머니가 되었다. 선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며, 그 시절을 견뎌 낸 조상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고 존경스럽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이야기는 이렇게 새로운 세계를, 새로운 인간을 만나게 해 준다. “이야기가 없다면 인간 세상을 이해할 길이 없다”고 했던 의 저자 윌 스토커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파친코’를 감상한 친구들과 같은 감정을 나누며 희망을 봤다. 드라마를 보고 난 이후, 우리는 경험한 적 없는 세상을 궁금해했다. 수많은 선자들에게 귀 기울이고 싶어 했다. 왜곡된 역사를 우리 조상들의 관점으로 바로잡고 싶은 의지가 생겼다. 청년세대는 물론이거니와 국경을 초월해서까지 비슷한 감상평들이 나오는 걸 보면, ‘파친코’ 이야기가 가진 힘이 위대하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일본으로 건너가 모진 세월을 견뎌 낸 조선인 여자의 이야기에 세계가 열광하고 공감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고 있다.
이야기를 듣지 않는 이상 타인의 삶을 절대 알 수는 없다. 어린 선자와 우리에게는 100여 년의 시간 차가 존재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를 들을 수만 있다면, 우린 그들의 삶을 가늠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갈등이 많은 사회일수록 다양한 관점에서 쓰인 이야기가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공감이 있을 때 갈등의 간극이 메워질 것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오늘도 우리를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에게는 각자의 서사가 존재한다. 한 인물의 서사에는 시대적 배경, 한 사람의 인간관, 문화적 맥락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건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그렇게 보면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몇 가지 사실들이 새롭게 느껴진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시대의 이야기가 되고, 대한민국의 이야기가 되고, 또 나의 이야기가 된다. 그게 이야기가 가진 힘이다.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이해의 폭이 넓어지기를 바라 본다. ‘파친코’가 보여 준 위대함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