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말 광] 959. 알맞은 자리, 걸맞은 말
이진원 교열부장

능력 없는 이가 과분한 자리에 앉아 있는 걸 보는 것만큼 부담스러운 일도 없을 것이다. 보기에 불안한 것은 물론, 애먼 사람들이 후과를 감당해야 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 또한 마찬가지. 알맞은 말이 제 자리에 앉아 있으면 아름답고 감동스럽기까지 하지만, 적절하지 않은 말이 자리를 차지한 채 버티면 글이 망가지고 마는 것이다.
‘합계 길이가 2.2km에 달하는 조선소 안벽에는 시운전 나간 1대를 제외하고 총 11대의 선박이 정박해 마무리 공정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기사에 나온 ‘대’가 바로 부적절한 말.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표준사전)을 보자.
*대(臺): 차나 기계, 악기 따위를 세는 단위.(녹음기 한 대./피아노 두 대./자동차 다섯 대./비행기 열 대./윤전기 세 대.)
피아노나 자동차나 비행기에도 ‘대’를 쓰지만, 배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다시 표준사전을 보자.
*척(隻): 배를 세는 단위.(배 한 척./여객선 두 척./군함 세 척.)
그러니, 저 기사가 불안정한 건 ‘척’을 써야 할 자리에 ‘대’를 썼기 때문. ‘책 5발, 수류탄 10권’과 같은 꼴인 셈이다.
‘지난 1일 수출전진 기지 부산항 신항 4부두에서 23만t급 HMM 로테르담함이 수출화물을 선적하고 있다./대우조선해양이 이번에 성능개량에 성공해 해군에 인도한 3000t급 구축함 양만춘호.’
여기 나온 ‘로테르담함/양만춘호’가 어색한 건, ‘함’이 군함에만 쓰이기 때문이다. 표준사전을 보자.
*함(艦): 해군에 소속되어 있는 배. 흔히 전투에 참여하는 모든 배를 이르며, 전함·순양함·항공 모함·구축함 따위가 있다. =군함.
통칭해서 ‘함정’이라고도 부른다.
*함정(艦艇): 크거나 작은 군사용 배를 통틀어 이르는 말. 군함, 구축함, 어뢰정, 소해정 따위를 이른다.(1860년 9월, 함정 70척과 3천5백 명의 병력을 추가로 상륙시킨 프랑스는 계속 점령지를 넓혀 나갔다.<이상문, 황색인>/바다에 떠 있는 크고 작은 함정들도 표시등을 깜박이고 있었다.<황석영, 무기의 그늘>)
큰 배는 함, 작은 배는 정(艇). 그러니, ‘상륙함/상륙정, 잠수함/잠수정’으로 나뉘는 건 크기 때문이다.
<美 “러 흑해함대 기함 모스크바호 우크라 미사일에 격침”>/<“러 ‘자존심’ 모스크바호 침몰엔 美 정보공유 있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도중 이런 기사 제목들이 쏟아졌다. 하지만 ‘모스크바호’는, 이제는 다들 알다시피, ‘모스크바함’의 잘못이었던 것. jinwoni@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