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손’이 보낸 희망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1998년 7월 7일 미국 위스콘신주 블랙울프런GC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US여자오픈 마지막 날. 이날의 주인공은 한국의 박세리와 미국의 제니 추아시리폰이었다. 손에 땀을 쥐게 한 연장 18번 홀. 샷 한 번만 삐끗해도 승패가 판가름나는 긴박한 순간, 박세리의 티샷이 당혹스럽게도 해저드 인접 경사진 러프로 들어갔다. 상식적으로 공을 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추아리시폰은 승리를 자신한 듯 상기된 표정이었다. 하지만 박세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양말을 벗고 물 속으로 들어가 가볍게 클럽을 휘둘러 탈출에 성공, 이를 바탕으로 기어코 우승을 이끌어 냈다.
US여자오픈이 어디 보통 대회인가. 메이저 중에서도 메이저로 불리는 대회다. 거기서의 우승은 곧 세계 최고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1998년 당시는 온 국민이 IMF 외환위기로 고통받던 때였다. 박세리는 그런 국민에게 기쁨과 용기를 심어 줬다.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는 상록수처럼, 불굴의 투지만 있으면 어떤 역경도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보여 준 것이다.
2009년 세계적 금융위기 때는 김연아가 있었다. 그해 3월 29일 미국 LA 스테이플스센터에서 열린 세계피겨선수권대회에서 김연아는 여자 싱글 사상 첫 200점을 돌파하며 우승했다. 2위와의 격차가 16점 이상 날 정도로 압도적인 기량에 1만 7000여 관중은 기립 박수로 환호했고 전광판에는 세계 신기록을 알리는 자막이 떴다. 10년 만에 다시 닥친 경제위기에서 김연아는 ‘희망의 아이콘’이 됐다.
2022년 5월 23일 영국 노리치의 캐로 로드에서 열린 잉글랜드프리미어리그(EPL) 노리치 시티와의 경기에서 손흥민은 리그 22·23호 골을 터뜨려 득점왕으로 우뚝 섰다. 아시아 출신 선수로는 처음이다. EPL이 어떤 무대인가. 지구촌 축구 리그 중에서 단연 으뜸으로 꼽힌다. 손흥민 스스로 말한 대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손흥민 개인의 열정과 노력이 만들어 낸 영예이지만, 동시에 코로나 19, 치솟는 물가 등 복합적 위기로 삶이 겨운 국민에게는 깊은 위로와 격려가 됐다. 나라의 위기 때마다 걸출한 스포츠 스타가 나와 희망을 갖게 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니 우리에겐 홍복이 아닐 수 없다. 손흥민의 지속적인 건승을 기원하며, 내친김에 호날두와 메시를 능가하는 위풍을 보여 주길 기대한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