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책을 빼앗긴 시대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영화평론가

1966년 개봉한 ‘화씨 451’은 인간의 생각을 통제하기 위해 책을 불태운다는 설정의 SF영화다. 프랑스 누벨바그 핵심 인물이자 대표적인 시네필 감독인 프랑수아 트뤼포는 자신의 다섯 번째 장편영화로 책이 사라진 암울한 미래 사회를 그린다. 그런데 그가 재현하는 디스토피아적 미래는 지금 보아도 낯설지 않다. 특히나 스마트폰으로 ‘보는’ 글자가 익숙한 사람이라면 영화 속 현실을 그저 공상과학으로만 치부하지는 못할 것이다.

영화는 한 청년의 집을 기습한 소방수들이 책을 찾아내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청년의 책을 모조리 찾아낸 소방수들이 책에 불을 지르고, 사람들은 마치 TV프로그램 시청하듯 멍한 얼굴로 이를 바라보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 ‘몬태그’의 직업은 소방수이다. 그런데 트뤼포가 그리는 미래 사회는 집과 건물에 내화성이 있어 더 이상 불에 탈 염려가 없기에 소방수가 필요 없는 시대이다. 미래의 소방수들은 불을 끄는 일이 아니라, 사람들이 숨겨 놓은 책들을 찾아내 불태우는 일을 한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방화범처럼 보일 정도다.

트뤼포 연출 SF영화 ‘화씨 451’
책이 사라져야 할 유물이 된 미래
소방수의 일, 책 태우는 일로 변질
기술 발전 속 우리가 잃은 것 없나


정부가 사람들로 하여금 책을 읽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영화에서 권력자의 실체는 드러나지 않지만 몬태그의 상사는 “책은 사람들을 오만하게 만들고, 책을 읽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믿기 때문”에 책이야말로 사라져야 할 유물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주장은 책을 읽은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으며 비판 정신을 가질 수 있으니 그 싹을 원천 봉쇄 하자는 뜻이다. 보이지 않는 권력자는 국민을 ‘사촌’이라 지칭하며, 가족이 하는 말은 틀리지 않으니 따라야 한다고 세뇌시킨다. 읽기를 포기한 사람은 생각하는 대신 TV 앞에 앉아 ‘가족 드라마’에 몰입한다.

종일 TV만 보던 몬태그의 아내 ‘린다’가 갑작스레 자살을 시도한다. 우리는 그녀가 죽으려고 한 이유를 알 수 없으며 남편 또한 묻지 않는다. 하물며 린다는 자신이 자살을 시도한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림 같은 삶 속에 무기력과 우울이 자리하고 있음을 눈치 챌 때, 신비로운 여자 ‘클라리스’가 나타난다. 삶에 순응하며 살던 몬태그는 클라리스를 통해 책을 읽게 되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기 시작한다.

‘화씨 451’은 프랑스어로만 작업을 하던 트뤼포가 첫 번째로 찍은 영어 영화이자 컬러 영화이다. 이전까지 흑백 필름으로만 작업했던 그가 SF문학의 거장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을 원작으로 그것도 컬러 영화로 연출한 건 시대의 변화(컬러 영화의 도입)를 받아들이겠지만, 다른 영화들이 보여주는 획일화된 방식이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로 인해 트뤼포는 오프닝 크레디트부터 인상적으로 만든다. 응당 크레디트는 관객이 읽을 수 있도록 자막(글자)으로 제공되는데, 트뤼포는 성우의 내레이션으로 연출부의 이름을 하나하나 ‘대신’ 읽어준다. 문자를 모두 불태워 버리는 영화의 내용을 형식적인 측면에서 구현하며 읽기를 잃어버린 시대를 직접 보여주는 것이다.

국가가 모든 책을 불태우자 책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하나둘 도시 외곽으로 모여든다. 그들은 책을 지닐 수 없으니, 직접 책이 되기 위해 책의 구절을 모두 외워버리는 ‘북 피플’이 된다. 함박눈이 내리는 북 피플의 마을에 책을 외우는 소리가 가득 울리며 끝나는 영화의 엔딩은 트뤼포의 영화 중 가장 아름다운 엔딩이 분명할 것이다. 과학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모든 것이 기계로 대체되고,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이를 당연시 여기고 있다. 그런데 더 빨라지고 더 편한 삶을 살고 있음에도 우리는 무언가를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영화의전당에서 상영하고 있는 트뤼포의 이 오래된 영화를 보며 생각한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